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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공의 마지막 헬기

세계 최강 미국이 도망치듯 철수한 이유

by 한정호

1975년 4월 30일.

베트남전쟁의 종지부를 찍은 사이공 함락. 그리고 그보다 더 강렬하게 기억되는 장면 하나.

미국 대사관 옥상에서 헬기로 탈출하는 장면.


그 순간을 담은 사진은 지금도 전쟁사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 중 하나로 회자된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믿고 싶지 않았던 그 장면은 ‘세계 최강의 군대’가 도망치듯 빠져나가는 모습으로 남아버렸다.

궁금해졌다. 대체 왜, 미국은 그렇게 준비 하나도 안하고 있다가 하루아침에 쫒겨나듯 철수했을까?


1. 전쟁을 끝내기로 한 미국

1973년, 미국은 북베트남과 ‘파리 평화 협정’을 맺는다. 주요 내용은 미군 철수와 평화적 통일 논의.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미국은 발을 빼고 있었고, 북베트남은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결국 남베트남은 미군의 지원 없이 북베트남군과 맞서야 했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2. “우리 아들들을 집으로 돌려 보내라”

미국 본토는 이미 전쟁에 지쳐 있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사했고, 언론은 학살과 비윤리적인 작전을 그대로 방송했다. 전국적으로 반전 시위가 일어났고, 백악관 앞에서는 매일같이 사람들이 외쳤다. "Bring our boys home!"

결국, 미국은 전쟁의 책임을 남베트남에 넘기기로 결정했다. ‘베트남화 정책(Vietnamization)’이 진행된 것이다.


3. 내부에서 무너진 남베트남

남베트남 정부는 미국의 원조와 군사 장비에만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부는 부패했고, 고위 관료들은 돈을 빼돌려 해외로 빠져나가기 바빴다. 군인들은 월급이 밀려 사기가 바닥이었고, 시민들은 “이 정부는 오래 못 간다”고 수군댔다.

결국 북베트남군의 기습에 도미노처럼 도시들이 무너져갔다.


4. 너무도 빨랐던 북베트남의 진격

1975년 3월, 북베트남은 중부 고원지대를 기습 공격한다. 그 이후 3월 말에 후에, 다낭을 함락하였고, 4월 초에 남하를 가속화하였다. 결국 4월 21일에 남베트남 대통령은 사임을 표명하였고, 4월 30일에는 최종적으로 사이공을 함락하였다.

남베트남은 채 두 달도 안 되어 붕괴한 것이다.


5. 작전명 "Frequent Wind"

사이공이 포위되기 직전, 미국은 ‘프리퀀트 윈드 작전(Operation Frequent Wind)’을 가동한다. 이는 헬기를 동원해 자국민과 협력자들을 빼내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계획은 있었지만, 그 순간조차 헬기 타기 위해 미 대사관 담을 넘는 군중으로 혼란스러웠다.


4월 30일,

대통령궁의 헬기 이륙은, 미국이 패배를 인정하고 뒤돌아선 ‘마지막 장면’이 되었다.


5. 왜 이 장면이 충격적이었는가

미국은 세계 최강의 군대였다. 항공모함, 전투기, 무기 모두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전쟁이 아닌, 탈출로 전쟁을 마무리했다.

그 헬기 한 대는 단순한 철수가 아니었다. 세계 패권국의 굴욕, 그리고 동남아시아 외교 실패의 상징이었다.


전쟁은 총과 미사일로만 끝나는 게 아니다

전쟁은 단지 누가 더 강한 총을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정치, 여론, 국민의 지지, 내부의 단결력까지 모든 것이 맞물려야 끝까지 버틸 수 있었다.

미국은 무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남베트남은 국민의 신뢰를 잃었고, 반면 북베트남은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 헬기는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전쟁은 눈앞의 적보다, 마음속의 준비가 먼저 무너질 때 끝난다.

그날 사이공 하늘을 가르며 떠난 헬기는 단지 병력의 철수가 아니라, 국가의 의지가 철수한 순간이었다. 지금 우리의 한반도도 언제 어떤 형태의 위기와 마주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총성이 들리지 않는다고 평화가 지속된다고 착각해선 안 된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정신이다. 신념이 꺾이지 않을 때, 비로소 나라가 흔들리지 않는다. 그 날의 헬기를 기억하며, 지금 우리가 타고 있는 이 ‘대한민국호’의 정신적 무장을 다시금 다져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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