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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Nov 23. 2020

86. 단골손님이란 이름의 빛

내가 사랑한 뤼벤의 풍경들

17.06.22 목요일 ~ 17.06.27 화요일


1. 오후 네시 즈음이면 건너편 건물에 반사된 빛이 내 방 안으로 들어온다. 창문 바로 앞에 위치한 내 책상은 그때마다 암막 커튼을 치지 않고서는 사용이 불가능할 정도로 환하게 빛이 난다. 최근 들어 나는 그 시간대의 책상을 암막 커튼을 80% 정도만 치고선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할 경우, 20%의 빈틈을 노리고 빛 한 줄기가 기숙사 방 안으로 길고 곧게 들어오는데, 그때 블루투스 스피커에 잔잔한 음악을 틀어 놓고 창문을 조금 열어 두면 산들바람에 빛줄기가 사뿐사뿐 스텝을 밟으며 책상 위에서 춤을 추기 시작한다. 어떤 음악을 틀어놓느냐에 따라 때로는 왈츠, 때로는 포크댄스가 되기도 한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 빛줄기에게 '단골손님'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손님과 함께 하는 공부 시간은 햇빛을 친구 삼아 함께 글을 읽고 쓰는 기분이 들어 그나마 덜 외롭고 덜 졸리다.


 


2. 빵은 주로 마트에서 사는 편이다. 왜 굳이 빵집에서 빵을 사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마트 빵도 유명 빵집 못지않게 맛있는 곳이 바로 유럽이기 때문이랄까. 1유로도 안 되는 가격에 이렇게 맛있는 빵을 즐길 수 있다니. 유럽에서 제빵사들이 쓰는 밀가루에는 무슨 비법의 가루라도 들어가는 걸까. 특히나 참깨가 듬뿍 올려진 빵들은 나의 제1 공략 대상으로 삼곤 하는데, 요즘 들어서는 그중에서도 참깨 크로와상에 푹 빠져 있다. 유독 허리가 굽은 크로와상을 산 날에는 테트리스를 하는 마음으로 자그마한 샐러드드레싱 종지를 크로와상의 옆구리에 쏙 집어넣는다. 어떤 날은 아귀가 잘 맞고 어떤 날은 그렇지 않지만, 혹 종지와 크로와상이 하나의 원을 완성하기라도 하면 플레이팅을 하면서부터 괜히 배도 더 고파지고 어깨가 으쓱으쓱 한다.




3.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에는 자그마한 아파트 단지가 있고 그곳에는 유치원과 그에 딸린 놀이터가 함께 있는데, 그 놀이터를 지나다니면 웬만한 기념일이나 축제는 잊지 않고 떠올릴 수 있다. 아이들의 체험 학습장이기도 한 곳이라 당시의 트렌드를 뤼벤 그 어느 곳보다도 빨리 캐치해 낸다. 핼러윈이면 핼러윈, 크리스마스면 크리스마스, 부활절이면 부활절... 그리고 며칠 전에는 장마 아닌 장마를 마치고 무지개가 자주 출몰하는 걸 기념이라도 하는 듯, 알록달록 무지개 빛깔의 나무 옷을 입혀 둔 게 아닌가.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나무가 푸르른 여름 잎사귀를 뽐내며 제공해주는 무채색의 그늘이라니. 그 오묘한 분위기와 풍경이 꽤나 마음에 든다.









To.Readers

우리에게(uns, [운스]):  뤼벤 시절의 나는 오후 네시 즈음 기숙사 방으로 들어오는 '단골손님' 빛줄기를 보고 이런 생각을 자주 했다. '특히 이 시간대의 이 장면은 한결같이 아름답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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