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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Nov 24. 2020

87.노란 리조또 가 있었다. 밀라노 힙스터는 없었지만

논문학기 도중에 A와 함께 한 밀라노 여행(1)

17.06.28 수요일 - 17.06.29 목요일


2학기 중에는 사실 논문 제출 외에는 크게 부담을 가질만한 일정이 없다. 때문에 시험기간이 아닐 때나 논문 작업에서 잠깐 쉬고 싶을 때(아무리 붙잡고 있어도 일에 진전이 없을 때가 있다) 종종 나만의 여행을 하곤 한다. 오늘부터 약 3일간은 평소 감행하는(?) 여행보다는 좀 더 통이 큰(?)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난생처음을 이탈리아를 방문해 보기로 한 것이다. 


'여행의 목적지'는 내겐 엄연히 이탈리아의 한 도시였지만, 마인츠대 교환학생 시절 알게 된 이탈리아 친구에게 물어보니 '그곳'은 이탈리아라고 하기엔 너무나 독일스럽거나 국제 도시 느낌이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로마나 피렌체, 베네치아 등을 구경하기에는 시간적 여유가 충분치 않으니, 차선책으로 가장 비행기표가 저렴한 '이탈리아의 그곳'으로 가는 수밖에. 2학기째 함께 수업을 듣고 여름 동안 국제기구 법 재시험을 함께 준비하게 될 홍콩 친구 A가 여행 메이트로 함께 했다. 


저녁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곳은 바로 밀라노였다. 공항에서 도심으로 그리고 도심에서 Air BnB 숙소까지 간신히 도착한 우리는 주인아저씨께서 챙겨주신 레모네이드(알고 보니 엄청 독한 레몬주!)를 한 잔 마시고선 2박 3일이지만 사실상 1박 2일과도 같은(첫째 날은 자면 그냥 지나가기 때문이다) 밀라노 여행을 시작했다. 


아기자기한 숙소의 모습과 주인 아저씨께서 냉장고에 넣어둔 웰컴 드링크들.



안타깝게도 밀라노의 첫인상은 회색빛, 울퉁불퉁한 인도 블록 그리고 빈티지 스타일이긴 하지만 전혀 안전해 보이지는 않은 가게 간판들이었다. 패션 위크가 아닌 밀라노에서 거리의 힙스터를 기대하는 건 순진한 일이었을까. 게다가 오후 세시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한국 장마철 폭우 같은) 소나기가 하늘을 흐리멍덩하게 바꿔놓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나") 이것 저것 먹으러 다니기 시작하면서 밀라노 여행이 슬슬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이틀 간의 베스트 3을 꼽자면 다음과 같다.



밀라노 여행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한 건 식료품점 EATALY를 한바탕 구경하고 나서부터였다. A와 나의 먹방이 시작된 것 또한 그 이후고.


하나, 피스타치오 젤라또. 지금껏 내가 먹어왔던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들은 죄다 설탕 덩어리였음을 깨달았다(특히 서른한 가지의 맛이 나는 그곳의 피스타치오는 왜 그토록 형광빛 초록색이던가!). 이탈리아에서 맛보는 피스타치오 젤라토는 채도가 낮은 초록빛을 하고 있었는데 유독 고소한 맛이 났다. 워낙 맛있길래 아껴 먹으려고 했더니, 젤라또가 하염없이 녹아내리기 시작해서 젤라또를 먹는 막바지에는 후루룩 하고 깨끗이 먹어보려고 갖은 애를 썼다.


둘, 이탈리아 대표 식료품점 EATALY의 카프레제. 무언가 있어 보이는 이름과는 다르게(왠지 어느 백작의 이름 같지 않은가, 카프레제~) 토마토와 모짜렐라 치즈, 그리고 허브 후추와 올리브 오일이 전부였다. 하지만 잠깐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해 주문한 심플한 애피타이저가 이토록 맛있을 줄이야. 신선한 식재료 만이 선사해 줄 수 있는 포만감은 바로 이런 카프레제를 먹을 때에 가능한 게 아닌가 싶다.


셋, 밀라노식 전통 리조또. 노란 빛깔이 꼭 고흐의 해바라기를 떠올리게 하는 이 리조또를 맛본 곳은 어렵게 수소문해서 찾아간 Casa Fontana라는 이름의 식당이다. 식당 홀에서 관광객 행세를 한 사람은 A와 나뿐이어서 리소토를 시킨 후 음식을 맛보기까지의 기다림이 더 설레었다(뭔가 로컬들만 찾아오는 식당 같달까?). 리조또의 부드러운 식감에 반한 나머지 순식간에 한 접시를 해치운 나와 A를 향해 주방장 아저씨가 인사를 하면서 방문객들을 위한 레시피 책자를 건네주셨다. 과연 내가 이 책자를 기숙사 공용 주방에서 따라 할지는 의문이지만 챙겨두면 언젠가 꼭 쓸모가 있겠다 싶어 가방 속에 쏙 넣어 두었다. 










To. Readers

우리에게(uns, [운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밀라노 공항과 인천 공항 간의 직항 노선이 있을 정도로 밀라노를 찾는 한국인들이 많다고 한다. 패션 위크 때문인 걸까, 명품 쇼핑 때문인 걸까. 그 이유가 궁금해진다. 무엇이 한국인들을 밀라노로 향하게 하는 걸까.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다음번에는 '비행기 표가 저렴해서요'라는 대답보다는 '밀라노식 리조또가 참 맛있거든요'하고 대답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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