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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Dec 01. 2020

94. 세계에서 가장 많이 리메이크된 작품

"Work+ Vacation = Work-ation" 런던 여행 (2)

17.07.07 금요일


앞서 밝혔듯이 이번 런던 여행의 테마는 워케이션(Work + Vacation = Work-ation)이다. 여기서의 Work는 여름 방학 동안 마무리 지어야 하는 나의 석사 논문과 재시험 과목(국제기구법... 하...) 하나를 의미한다. 오전 중에 2학기 성적이 발표되었는데 생각보다 잘 나와 의욕 넘치는 상태로 남은 Work에 박차를 가하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내가 런던을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 '문학'으로 오늘 하루를 가득 채우려 했다. 셜록홈스 뮤지엄 개장 시간에 맞춰 베이커 가 221B 번지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5년 전부터 눈에 아른거렸던 셜록홈스 모자를 거금(49파운드)을 주고 구입했다. 그리고 템즈 강변에 위치한 셰익스피어 글로브 극장으로 이동했다. 예매해 둔 연극 시작 시간은 14시였다.



2017년 여름, 글로브 극장은 'summer of love(여름의 사랑)'을 주제로 'twelfth night(십이야)'나 'much ado about nothing(헛소동)'과 같은 고전들을 줄줄이 라인업으로 내세우고 있었다. 알록달록한 love 간판이  때마침 벌어지는 London Pride 퍼레이드와도 잘 어울리는 듯했다. 공연 시작 1시간 전에 도착했는데도 벌써 극장 앞에 인파가 몰렸다. 아마도 글로브 극장 'summer of love' 시즌의 주인공과도 같은 작품 <로미오와 줄리엣>의 공연이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단, 오늘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고전적이라고 하기엔 꽤나 힙한 연출이 돋보여 그냥 <로미오와 줄리엣>이라고 하기엔 아쉬운 연극이다.


현대극으로 각색한 <로미오와 줄리엣>을 즐기는데 들인 돈은 단돈 5파운드다. 5파운드의 주인공은 글로브 극장의 진면목 드러나는 자리, 바로 입석이다. 콘서트 장의 스탠딩석을 떠올리게 하는 글로브 극장의 입석은 뻥 뚫린 원형 극장의 하늘 아래 동양식 목조 건물의 위용이 돋보이는 무대의 바로 앞, 마당 전부를 좌석의 범위로 삼는다. 별도의 좌석 구획이 없기 때문에 극장 1층으로 들어간 후에는 어디에 서서 연극을 보건 관객의 마음에 달렸다. 물론 세 시간 가까워지도록 연극을 서서 볼 자신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2층과 (3층이라고 하기엔 다소 애매한) 2.5층에 앉아서 연극을 관람하는 자리 또한 마련되어 있다(물론 이런 좌석들은 5파운드가 아니다). 하지만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는 연극 관람을 원한다면 5파운드 입석(이른바 Yard Standard)이 가장 최고의 선택이다.


7월 오전의 런던은 꽤 더웠다. 게다가 연극은 뙤약볕이 내리쬘 14시 한낮에 시작다. 뻥 뚫린 천장 때문에 여름 햇살이 내 머리와 이마를 직통으로 려대자 과연 인내심 있게 연극을 끝까지 관람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다른 곳도 아닌 영국 현지에서 셰익스피어 연극을 즐길 수 있다는 사실에 설레는 마음이 커졌다.



시작하기 전이나 인터미션, 그리고 공연 후의 소란한 가운데 글로브 극장 내부 사진 몇 장 찍어둘 수 있다(공연 중 사진 촬영은 당연히 금지!) 두 다리 걱정하면서 공연을 기다렸는데 막상 공연이 시작하자 괜한 걱정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클럽에 온 듯한 캐퓰릿 가의 파티장을 첫 장편으로 YMCA 노래에 맞춰 극 중 인물들이 율동을 하자 '글로브 극장이 제대로 현대적 각색을 시도했구나!'라는 신선한 충격에 휩싸였다. 캐퓰릿 가의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의 코스튬 중에는 엘리자베스 여왕과 런던의 시그니처 뮤지컬들의 등장인물들도 찾아볼 수 있었다. 대형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둥둥 소리가 스탠딩 석이라는 특별 좌석의 특성과 결합되어 마치 콘서트장에 온듯한 느낌을 주었다.


사랑꾼 로미오가 극장 마당에 들어서 있는 관객들 쪽에서 등장할 때의 모습이 어딘가에 찌들어 있는 오늘날 10대 청소년 모습을 하고 있는 연출에선 크게 웃었다. 헤드폰을 쓰고서 껄렁껄렁 리듬을 타는 게 로미오와 꽤 잘 어울렸다. 로미오란 인물 유형/등장인물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이번 연극의 로미오는 꽤나 멋져서 (아무래도 배우 버프가 크다) 종종 입석에서 로미오가 불쑥 튀어나오곤 할 때면 (아마도 이런 게 석의 매력이자 특권이겠지. 배우와 무대와 가까이에서 함께 호흡하는 것!) 눈을 떼지 못했다.


또 <로미오와 줄리엣>하면 떠오르기 마련인 발코니 장면의 연출이 궁금하기도 했는데, 그 장면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의 대사 몇 마디에 입석 관중들순식간에 줄리엣 방 앞에 난 거대한 나무들로 변신하는 게 아닌가. 관중들을 나무 취급하며 관중 사이를 비집고 무대(발코니)로 향하는 길을 만들어가 로미오는 연신 'Come away through! Excuse me, gentle, kind trees! (곧 가요! 실례합니다, 상냥하고 예의 바른 나무들아.)'라면서 관중들에게 말을 걸었다.


여러 면에서 각색의 재치가 돋보여 200% 즐길 수 있던 <로미오와 줄리엣>이었다. 내숭 떨지 않는 말괄량이로 줄리엣을 표현한 것도, 프라이어 목사의 괴짜스러움을 교회에의 풍자와 흡사 흑 마술사처럼 표현한 것도, 게다가 머큐시오를 여배우로 캐스팅해 로미오-머큐시오, 쥴리엣-티볼트 이렇게 남-녀의 애도 구도를 짠 것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에서처럼 로미오가 마시는 독약을 권총으로 대체한 것도...


원작이나 영화에서만큼 이나 유모 캐릭터가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내진 않았다. 진지한 장면에서 비둘기가 극장으로 푸덕이며 들어와 산통을 깨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베로나 시장의 목소리가 극장 위쪽에서 들려와 마치 시장의 목소리를 하늘의 소리처럼 장엄하게 울려 퍼지던 때도 기억난다. 나이팅게일이냐 종달새냐를 두고서 첫날밤을 치른 후 '사랑하는 이여 가지 마세요'라고 대화를 주고받던 장면 또한 열정적이었다(너무 애절하다). 영국의 재치에 깔깔 웃다가 화들짝 놀라기를 반복하며 Yard Standing에서 그렇게 오후를 보냈다.



To.Readers

우리에게(uns, [운스]): 함께 연극을 보러 온 영국의 한 사립학교 학생들이 극장의 분위기를 활기차게 주도한 점 또한 이날 공연의 포인트였다. 본고장에서 즐기는 셰익스피어 극이라 더 오래 기억에 남겠지. 다음번 런던에서도 꼭 들르고 싶다. 런던의 공연 문화는 뮤지컬이 전부가 아니다. 정말.

그때 그 <로미오와 줄리엣> 공식 후기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Q4-gYTXXt0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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