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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Dec 02. 2020

95. 런던의 꽃 시장,
오드리 헵번은 없었답니다

"Work+ Vacation = Work-ation" 런던 여행 (3)

17.07.09 일요일


콜롬비아 꽃시장(Columbia Flower Market)으로 튜브(Tube: 런던 지하철의 애칭)를 타고 움직였다. 난생처음 가보는 런던의 구역으로 떠나는 여행이라 설렘이 더했다. 꽃시장으로 향하는 길 내내, 나는 어린 시절 몇 번이고 돌려봤던 '마이 페어 레이디(My Fair Lady)'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렸다. 오드리 헵번이 Posh English(우리가 기본값이라고 여기는 영국식 영어, 하지만 사실은 엘리트 계층이 쓰는 고급 영국 영어)에서 거리가 먼 영어를 구사하면서 어설프게 꽃을 팔던 장면, 그 장면 하나 때문에 나는 지금까지 런던 꽃시장에 관한 환상을 갖고 있다. 게다가 영국 사람들의 가드닝(gardening) 문화에 관해서도 익히 듣고 본 게 있었기에, 꽃과 늘 가까이 지내려는 영국 사람들의 주말 꽃시장 풍경이 이전부터 궁금하기도 했다.



콜롬비아 꽃시장은 일요일마다 열리는 소규모의 시장으로, 자그마한 빈티지 상점들 주변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시장과 가까워질수록 거리가 꽃향기로 가득 찼다. 거기까진 참 좋았다. 그러나 머지않아 런던 꽃시장에 관한 나의 오랜 환상은 제대로 깨져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우선 오드리 헵번이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근육질 팔뚝을 자랑하며 타투와 '러닝셔츠' 차림의 아저씨들의 꽃바구니를 쉴 새 없이 옮기면서 '후- 원트 썸 썬--플라워!?' 하고 소리를 지르시는 게 아닌가(맙소사...). Posh English는 기대하지 않았다. 무언가 꽃을 닮은 사람이 꽃을 추천해주는 풍경을 기대했는데... 


그런데 또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아저씨 분들이야말로
꽃을 더 돋보이게 해주는 역할을 하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든다.
 진정한 프로... 였던가 그들은?





꽃시장에서 오드리 헵번을 찾지 못한 채, 나는 국회의사당 근처에 위치한 테이트 브리튼(Tate Britain) 미술관으로 향했다. 터너의 뿌옇고 몽환적인 그림들은 나를 곧잘 매료시킨다. 특히 기차역 풍경을 그린 터너의 붓터치를 오래도록 보고 있으면 금세 선로 아래로 빨려 들 것만 같아 쉽게 정신을 빼앗긴다. 그런 터너의 그림들을 한 데 모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테이트 브리튼이라고 한다. 최근까지 데이비드 호크니 전시를 성황리에 마쳤다는 테이트 브리튼은 글로브 극장 주변의 테이트 모던만큼 사람이 붐비진 않았다. 왠지 모르게 우리나라의 국립중앙박물관과 분위기가 닮아 있었다. 양질의 소장품들을 쾌적한 환경에서 감상할 수 있어 무엇보다 좋았다. 사람이 소장품보다 더 많이 들어찬 미술관의 전시실만큼 정신없는 곳도 없지 않은가. 게다가 때마침 터너 컬렉션 관을 둘러보려고 할 때, 무료 큐레이션이 시작되었다. 옳다구나, 싶어 해설사 분 옆을 바짝 쫓아다니며 그림에 얽힌 설명을 들었다. '예술가는 가난하다'라는 전통적이고 (다소 왜곡된) 낭만적인 이미지가 있는데, 터니는 그 이미지를 깡그리 무시한다. 현역 때에도 죽고 나서도 터너는 잘 나갔던 부유한 예술가였다고 한다(부러운 사람!).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는 영웅화를 그릴 때, 터너는 기존의 영웅화와 달리 자연 앞에 한낱 미물인 한니발, 제 아무리 영웅이라 칭송을 받아도 그저 인간일 뿐인 한니발을 그려내고자 했다고 한다. 또한 물을 좋아하던 터너는 난파선을 주제로 한 그림을 그릴 때에도 흔한 이미지, 틀에 박힌 이미지(예: 선원이 난파선을 향해 손가락을 치켜세워 관객들의 관심을 유도하는 풍경)보다는 난파선을 둘러싼 물결과 파도의 소용돌이, 물의 움직임에 초점을 맞추려고 했다고 한다. 기존의 편견, 기대를 깨면서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터너의 자세가 꽤나 마음에 든다. 



터너 큐레이션이 한창인 테이트 브리튼의 풍경
테이트 모던 근처의 풍경들: 옆에서 봐도 멋진 국회의사당과 말을 땅 속에 묻어 버린 놀이터






To. Readers

우리에게(uns, [운스]): 테이트 브리튼을 방문한 날은 나 홀로 런던 여행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을 무렵이다. 유럽여행을 온 친구 두 명, 그리고 부모님을 만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함께 어딜 가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먹지'하는 행복한 고민이 끊이질 않았다.

 혼자만의 시간은 무척이나 소중하고 내가 절대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 생활의 일부이다. 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 또한 놓치고 싶지 않다. 혼자만의 시간과 함께하는 시간 간의 균형을 맞춰가는 것. 그것은 아마도 나의 오랜 숙제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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