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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Dec 09. 2020

102. 귀국길에 무지개가 떴습니다

유학 생활을 마무리하는 방법 (3): 일상의 여행지, 뤼벤

17. 09.09 토요일


짐 정리를 얼추 마치고 달력을 보니 어느덧 토요일이다. 방 한 칸과 개인 화장실 하나 딸린 기숙사 방. 이 좁은 공간에 1년 사이에 뭐가 그리도 많이 들어찼는지. 지난 3일 간 하루 종일 비가 추적추적 내려 한낮의 산책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기숙사 주변만을 서성였다. 그리고 뤼벤에 머무를 날이 달랑 3일 남은 오늘에서야 쨍쨍한 햇살이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1년 간 지내온 이 도시(사실 도시라고 말하기엔 아담하다)의 인상은 대략 이러했다. 


안전하다 못해 편안했고, 배움의 기운을 잔뜩 받았으며, 
다정한 사람들에게 인사를 할 정도의 여유를 갖게 되었다.


뤼벤 주민의 대다수는 뤼벤대 학생들이거나 은퇴생활을 즐기러 온 노부부이다. 때문에  밤 10시가 다되어도 안전 귀가가 가능하다(CLT에서의 불어 수업을 마치고서 기숙사로 터덜터덜 걸어가며 맞는 밤공기가 유독 좋았다). 무차별 테러로 얼룩진 2016/17년의 유럽 상황이 이곳에서만큼은 먼 곳의 뉴스 같았다. 30분 동안 기차를 타고 도착한 수도 브뤼셀은 뤼벤에 비하면 그야말로 무법지대나 다름이 없다.


영국의 옥스퍼드를 떠올리게 하는 대학 중심의 도시. 뤼벤은 배움을 가까이하고 반긴다. 그렇다 보니 거리에서 서점을 발견하는 일도 잦고 지적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는 '소박한 대학가 풍경들(이를테면 <죽은 시인의 사회>를 떠올리게 하는 교수님과 학생들 간의 열띤 토론 라운드테이블, 국제학생들끼리 준비한 모의 기후변화 협약 혹은 모의 유엔의 현장, 탄소 배출량 제로 도시를 목표로 자전거를 타고 등하교 하자는 캠페인 운동을 벌이는 동아리들 등)'이 많다. 특별히 내가 학생으로 있었던 중에는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축제를 도시 전체가 기획하는가 하면 곧 다가올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둔 세미나들과 뤼벤대를 준비하기도 했다. 강의실(이론)과 삶(실제) 간의 괴리가 뤼벤에서만큼은 덜한 듯도 하다(최소한 서울에서의 느껴지는 괴리감보다는 덜하다). 배움을 삶 속에 녹아내 볼 수 있는 기회들이 인턴십이나 일자리, 도서관 등의 콘텐츠, 교수님 혹은 또래 학생들과의 교류 등으로 많다. 도시 전체가 대학(원)생들에게 힘찬 응원의 메시지를 건네는 분위기랄까. "열심히 공부해! 넌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될 수 있어!"라고(하...)


뤼벤 사람들은 인사성이 밝다. "Dank u wel(감사합니다[당큐웰]!)"하는 감사의 습관을 들인 사람들이 그토록 다정해 보일 수가 없다. 네덜란드어를 주요 생활어로 쓰지만 영어 또한 수준급으로 구사하는 사람들이 많아 외국인으로서 소통의 과정에서 소외될 일이 거의 없다. 생활언어의 텃세가 가장 심할 법도 한 관공서에서도 굉장히 친절했고 한번도 '나는 이곳에서 소수에 불과했자'라는 받질 못했다(독일에서의 교환학생 시절엔 그런 경우가 종종 있었기에, 뤼벤 사람들의 이러한 오픈 마인드 자세는 정말로 이 도시가 지닌 큰 강점 중 하나다!).  


이랬던 나의 뤼벤을 이제 떠나야만 할 때가 왔다. 주말이 지나면 월요일 아침, 시청을 찾아 Deregisteration("나 이제 귀국해!"라는 공식 행정절차)을 마치고서 ING 은행에 들러 계좌를 폐쇄할 예정이다. 그다음의 일정은 커다란 케리어 하나와 기내 반입용 케리어 하나에 나의 모든 것들을 테트리스 하듯 (구겨) 담아보는 것이다.  


귀국을 위한 '지극히 필수적인 일정'만을 남겨둔 지금, 나의 키다리 아저씨 Y가 뤼벤을 찾아오셨다. 사모님에 따님과 손자까지 가족 나들이 겸 한국 과학자들과의 모임 장소로 가는 길에 같이 밥이라도 먹자며 나를 챙겨주러 오신 거다. 덕분에 한국분들 사이에서 늦었지만 맛있는 점심을 함께 할 수 있었다. 


Y 아저씨의 가족 분들과 함께 한 식사 자리는 참으로 감사했다. 하지만 함께 식사를 하게 된 다른 한국 분들 탓에 다소 마음이 불편해졌다. 귀국을 앞둔 나의 소감을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사실 재시험과 논문 심사 결과를 확인하지 못한 채 돌아가게 되는 상황이라, "미련 없이 공부하다가 금의환향합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겠는 거다. 거기에다가 아주머니들의 넓은 오지랖이 나를 곧잘 예민하게 했다.


사실 유학 생활의 결과를 제대로 확인도 못한 채 돌아가야만 하는 상황이 다소 불안했다. 좀 더 있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한국에서의 대학원 생활도 '논문 학기'로 마무리 지어야 했고... 때문에 유학 생활에 관한 전반적인 소감으로 "한국에서만큼 좋은 점수를 얻기가 어렵고, 2년 과정이 1년으로 편성된 만큼 빡빡하게 학사 일정이 돌아가 집중하지 않으면 낙오되기 쉬웠다. 때문에 제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에너지를 다 쏟아부으려 노력했다."와 같은 답변만을 반복하며 속마음을 숨겼다(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니깐). 


그러다가 급기야는 식탁 앞에서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던지는 '뻔한 질문들(나를 불안하게 하는 질문들)'에 답을 해주기 싫어졌고, Y 아저씨의 조카가 뛰어놀고 있는 식당 뒤뜰로 몸을 피하기로 했다. '아이들 사이에 앉아 놀아주는 척이라도 하면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겠지,' 하는 마음에서였다. 브뤼셀과 뤼벤 사이의 어디쯤 에 위치한 이 식당은 자그마한 뒤뜰을 갖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푸른 초원이 정면으로 바라보였는데, 그때 그 탁 트인 풍경이 기분을 한결 나아지게 해주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무지개가 떠 있는 게 아닌가(그것도 쌍무지개가!). 기독교에서 무지개는 '약속' 혹은 '언약'의 상징이다. 노아의 방주가 홍수를 뚫고 새 땅 위에 정박(?) 한 후에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띄우셨던 일화를 대표적인 예시로 들 수 있듯이 말이다. 왠지 눈 앞에 펼쳐진 무지개와 푸른 초원이 식사 도중의 내 불안했던 마음을 다독여주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풍경은 내게 크게 소리치고 있었다. 




아무 걱정하지 말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렴.




한 동안 무지개를 쳐다 보았다.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색깔이 다 있는지를 확인해 보기도 했고, 약속의 상징이 하필 이 시간, 이 마음 상태에 내 눈앞에 나타난 이유를 질문했다. 찰칵. 사진을 찍었고 나무 벤치에 앉았다. 


이윽고 귀국을 앞둔 나의 분주한 마음 가운데에도 무지개가 떴다. 그리고 17년 9월 13일. 평창 동계 올림픽/패럴림픽 준비가 한창인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1년 간의 뤼벤대 유럽학 석사 과정, 이제 남은 것은 무사히 학위증을 수령하는 것뿐이었다.









To. Readers

우리에게(uns, [운스]): 브뤼셀 공항에 내렸던 유학생활의 첫날과 마찬가지로 나의 귀국길에는 연차를 내고 배웅을 나와 준 친구 M이 함께였다. M이 동행해 주지 않았더라면 도저히 혼자 들고 갈 수 없는 짐들이 수두룩 했기에 친구의 수고와 애정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게다가 추가 요금을 내고도 32kg까지만 받아준다는 KLM 항공에서 내가 뤼벤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간다는 상황을 듣더니 33.5kg의 캐리어를 추가 요금도 받지 않고서 그냥 부처 주겠다고 한다(뭐 이런 행운이!).

 후련하고도 감사한 마음으로 탑승 수속을 마치고선 M과의 이별 직전의 커피 타임을 가졌다. 당장 내일에도 만나서 함께 요리를 하거나 산책을 하거나 카페를 방문할 것만 같은데 M과의 만남도 잠시 동안은 안녕이라니.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를 묘한 커피 타임이었다. 


지금까지 <와플의 나라에서 유럽연합을 배우다> 시리즈를 함께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귀국 후의 이야기, 에필로그 한 편을 끝으로 매거진을 완성지어 보겠습니다. 내일 뵐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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