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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Aug 31. 2020

2. 이어폰을 끼고 걷는다면
당신은 뤼벤의 한국인일지도

서울의 습관을 하나 넣어두고, 서울의 또 다른 습관을 하나 꺼내고

16.09.24 토요일


이곳 사람들(대부분 학생들이겠지)은 이어폰을 잘 끼지 않는다. 음악과 스마트폰에 심취해 길을 걷는 서울 사람들의 행동이 곧 나의 습관이었기에 이곳에 온 지 열흘도 되지 않아 이어폰 없이 걷는 뤼벤 사람들의 모습이 계속해서 눈에 들어왔다. 뤼벤 주민들은 함께 걷는 이와 눈을 맞추며 이야기하고 애완견과 산책을 하는 걸 더 즐기는 것 같아 보인다. 


기숙사를 막아선 공장 느낌의 갈색 벽돌 아파트.  아파트의 뒤쪽으로는 편의점에 자리한 벨기에 맥주 Stella Artois의 공장이!


일전에 나의 기숙사 이름을 'Waterview(워터뷰: 물이 보이는 풍경)'라고 소개했었다. 이어폰 없이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을 주로 관찰하던 곳이 바로 그곳이다. 기숙사 이름처럼 정말 '워터뷰'가 있는 곳이다. 웬 공장같이 생긴 갈색 아파트 건물 앞에는 운하가 놓여있는데(아이러니하게도, 기숙사 창밖에서는 이 운하가 아닌 갈색 아파트 벽만 보일 뿐이다 하하), 이곳에 꽤나 힙한 분위기가 나는 펍이 있어서 일까, 뤼벤 중심부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데도 사람 구경하기 나쁘지 않을 정도로 적당한 인파가 모인다. 그러나 오늘은 이곳에서 사람 구경을 하고 있을 여유가 없다. 곧 있으면 뤼벤대학교의 개강일이고, 나는 신입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러 가야 하기 때문이다.


뤼벤 새 학기 OT에 참석하고 나면 공짜 굿즈/학용품을 가방에 꽤나 많이 담아 오게 된다. 손 모양을 한 짜리 몽땅, 실용성 제로의 형광펜이 눈에 띈다.

이때 신입생으로서의 도리란, 초롱초롱하게 눈을 뜨고서 학교 프로그램 및 학생 복지 혜택 등에 연신 질문을 해대는 열정적인 태도를 말한다(뭐, 돌이켜 보니 그 도리에 맞게 생활하진 못한 것 같지만). 그저께부터 학사, 신학기 입학생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OT 및 프로그램 설명회들이 열리고 있다는 내용의 메일을 몇 통이나 받았는지 모른다. 암막 커튼을 걷고 지역 문화를 조금이나마 따라 하다 보면 혹 새로운 풍경을 마주할까, 싶어 서울에서의 습관(이어폰을 꽂고 길을 활보하는 습관)을 잠시 가방 속에 넣어둔다. OT가 이뤄지는 장소로 가기 위해선 뤼벤 시내까지 20분 정도 걷는다(버스가 없을 리 없지만, 학생 도시인 뤼벤은 웬만하면 걸어 다닐 만한 도시다). 



OT 장소는 역시나, 이 동아리, 저 동아리에서 신입 회원들을 모아보려고 애를 쓰는 학생들로 시끌벅적했는데, 나는 공짜 학용품 몇 가지를 챙기고 뤼벤 분리수거 인포그래픽 포스터 하나를 손에 쥐고선 그 자리를 얼른 떠나왔다. 아무래도 유학생이라는 신분 때문일까 주변 눈치를 많이 보게 된다. 뤼벤이라는 도시와 이곳에서 생활하는 나 자신이 아직도 익숙지 않고, '나는 로컬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여전히 머릿속에 맴돈다 (모르는 사람들로 북적북적, 그리고 외국어로 가득 찬 OT 장소에 오래 머물기에는 그리 사교적이진 않은 걸까). 그렇지만 (지난 2-3일간의 생활을 돌아보건대) 본격적으로 개강하지 않은 이 시점,  '게을리 하루를 보내버려야지, ' 하는 생각 잠깐이면 한없이 게을러지기도 쉽다. 그럴 때마다 마치 양지바른 곳을 알아서 찾아가 재빨리 녹아버리는 버터 덩어리를 나와 동일시하게 되는데(지난 며칠간 나는 정말 뙤약볕의 버터 덩어리 그 자체였다...), 학용품 몇 개와 분리수거 포스터를 챙겨서 기숙사로 다시 걷던 오늘만큼은 버터가 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 커져만 갔다. 


서울에서의 습관들 중 하나 (바로 이어폰을 꽂고 길가의 주변 소리를 차단하는 것)를 자제하면서 시작한 하루였지만, OT 장소를 나오면서, 나는 서울에서의 또 다른 습관 하나를 실천해 보자고 다짐했다. 그 습관은 바로 서점에 '놀러 가는' 것! 중앙도서관 근처에는 여느 대학교처럼 꽤나 큰 서점이 있겠지, 하면서 도서관 쪽으로 걸었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곳은 불어권 국가들의 교보문고와 같은 서점, Fnac이었다. 


네덜란드어를 읽을 줄은 모르지만...  #klassiekedeutjes 뭔가 클래식 음악에 관한 아동 도서라는 직감이 들었다.

한국에서 들고 온 책은 단 두 권뿐이었다(그것도 무슨 '감성 바람'이 불었는지 시집만 달랑 두권 들고 왔다. 윤동주 시집과 정지용 시집). 때문에 맘에 드는 책이 있으면 장르가 무엇이었든 간에, (읽을 수 있는 언어로 되어 있다는 전제 하에), 한 권 사고 싶은 마음이 컸다. 영문학 개론 수업 때 스리슬쩍 접해보았던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알록달록한 책들이 많은 곳, 어린이 책들이 쌓여 있다시피 한 곳으로 발을 옮겼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책은 클래식 음악에 관한 아동 도서였다. 가벼운 종이로 만들어진 책으로 형형색색의 그림들이 페이지를 가득 메우고선 작곡가의 이름과 대표곡을 나타낼 수 있는 그림이 크게 그려져 있었다. 책 모서리에는 동그란 구멍이 나 있었는데, 그위에 손을 갖다 대자마자 슈베르트 '숭어'의 메인 선율이 전자 멜로디로 쩌렁쩌렁 울렸다. 어찌나 소리가 크던지 고요한 서점 안이 전자 클래식 음악으로 금세 시끄러워졌다. 괜히 부끄러운 마음이 든 나는 아까 눈도장을 찍어둔 <더블린 사람들>을 손에 꼭 쥐고서 계산대로 도망쳤다. 


To Readers.

uns(우리에게: [운스]): 출퇴근길, 등하교길 혹은 어느 이동 상황에서건. 이어폰을 빼고서 주위를 둘러보거나, 귀와 함께 눈을 비롯한 여러 감각들을 잠깐 쉬게 하는 건 어떨까. 의외로 더 많은 게 들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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