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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Sep 05. 2020

7. 가을날의 토요 장터에서 꽃과 함께 라면을 끓이다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가까이하고 싶으니깐요

16.10.08 토요일


중세시대의 사회복지시설인 Begijnhof의 하얀 벽돌 건물들이 한 골목을 이루고 있다.


워터뷰 기숙사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한 골목을 찾았다. Het Klein Begijnhof이라는 설명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 이 골목은 1272년에 처음으로 역사에 언급된 곳으로, St.Gertrude 수도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베긴 수도원/여성 전용 양로원 건물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이곳의 건물들은 중세 시대의 교회를 중심으로 세워진 사회복지시설인데, 벨기에가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점점 더 많은 여성들 가정 내 남편이나 아들, 오빠/형 등 남성들의 부재로 생활이 힘들어지자 모여 살게 된 공동 주거 구역이라고 한다.


Begijnhof 건물들은 따닥따닥 여유 없이 붙어 있어 숨 막히는 풍경을 연출해 내고 있었다. 하지만 창문마다 집주인의 개성을 보여주는 화분이 놓여 있고 문패 또한 집마다 다른 디자인을 하고 있어 '복사+붙여 넣기'의 단조로운 분위기를 풍기지는 않았다. 암흑의 시대라고만 알던 유럽 중세시대에 '복지'라는 이름의 씨앗이 뿌리내리고 있었다는 게 흥미롭다.





작은 Begijnhof을 지나 뤼벤 링 안에 위치한 아시안 슈퍼마켓 중 가장 큰 슈퍼마켓으로 걸었다. 때마침 뜨끈한 라면을 끓여 흰쌀밥을 말아먹고 싶었고, 마켓으로 걷는 길이 일전에 Mirte라는 분홍색 방울꽃을 팔고 있던 이쁜 골목을 지나가는 길이라 괜히 더 그쪽으로 걷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링 중심부로 가까워질수록 거리가 유독 더 시끌시끌 해졌다. 평소 조용하던 뤼벤에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토요일 장터가 선 모양이었다.





토요 장터가 들어선 뤼벤 링 안의 중앙광장을 본 이후로는 매주 토요일만을 기다리게 된다. 꽃을 고르시는 할머니의 모습이 사랑스럽다.



주말장의 큰 비중을 차지한 건 간이 꽃시장이었다.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늘 꽃과 가까이 지내는 유럽 사람들의 마음이 장터 곳곳에서 드러났다. 특히나 가을의 풍경을 한 올 한 올 깃털로 빚어 놓은 듯한 식물(위 사진 오른쪽)이 어찌나 이쁘던지, 세일 중이라는 안내 문구에 하마터면 충동구매를 할뻔했다. 중학생 시절 오드리 헵번 주연의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My Fair Lady)>를 몇 번이고 돌려 보면서, 나는 오래전부터 유럽 꽃시장에 관한 버킷리스트 목록을 몇 가지 세워 두었었다. 그 때문에 토요장터에서 쉽사리 발걸음을 떼 진 못했으나, 결국 기숙사로 돌아올 때 손에 쥔 건 라면 세 봉지가 전부였다.



아시안 슈퍼마켓 앞 쪽으로 보이는 풍경. 아래로는 물이 흐르고 정면으로는 어느 교회의 종탑이 보인다.


 

'좀 더 마음에 쏙 드는 꽃이 있을 거야'라는 생각이 있었고, 무엇보다 토요 장터 뒤편으로 자리한 뤼벤 곳곳의 싱그러운 풍경들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꽃 한 다발을 품에 안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뤼벤에 온지도 이제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그새 옷차림이 조금 두꺼워졌고, 뜨끈한 라면 국물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아직은 매대에 색색의 꽃들이 진열되고 있지만,  곧 이 꽃들이 연말을 밝히는 색색의 조명들로 바뀌어 있겠지?







To. Readers

우리에게(uns, [운스]): 언제부턴가 서울에서도 멋진 꽃집들을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꽃을 구독하는 서비스가 있는가 하면, 친구들 사이에도 꽃을 주고받는 문화들이 많아졌다. 꽃이 가까이하기 쉬운 상대는 아니란 생각이 들면서도 꽃이 채워주는 삶의 향기를 떠올리면 꽃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꾸준히 커져만 간다. 꽃에 관한 우리들만의 이야기, 소원은 무엇이 있을까?

[꽃에 관한 나의 버킷리스트 세 가지]

첫째, 영국 런던의 코벤트 가든을 찾아,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의 꽃시장 장면을 카메라에 담아 보기. 둘째, 로컬들이 방문하는 꽃시장을 걸으며 제철 꽃들은 물론이고 그 꽃들을 사러 온 사람들을 관찰해보기. 셋째,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한 꽃을 여행지에서 구매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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