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심리를 공부한 친구는 말했다. 사람의 마음이 어느 방향으로 향하더라도 반대쪽 방향이 완전히 배제되진 않는다고. 결국 과한 자신감과 열등감도 '한 끗 차이'라고. #김영하북클럽 #9월의책 #다정한것이살아남는다 #survivalofthefriendliest 또한 비슷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책을 덮은 추석 연휴의 마지막 날,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서늘하다. 다정함이 오늘날의 인류를 가능케 했다면, 어째서 우리는 극악무도한 일은 멈추지 않는 걸까. 어쩌면 친절과 폭력 또한 '한 끗 차이'이지 않을까.
우리가 다정함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우리 것, 내 것'이 된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외부인 취급을 받으며 울타리 바깥으로 밀려난다. '우리 것, 내 것'을 챙기고자 하는 마음은 외부인을 비인간화하게도 한다. 이 대목에서 놀랍게도 (떠올리고 싶지 않은 - 누구나 그럴 거다 -) 석사 논문이 생각났다. 유럽 사람들(특별히 독일인)이 나와 우리를 어떻게 정의하고 나와 다른 사람(특별히 난민)에게 어떤 선을 긋는지에 관한 궁금증에서 시작한 논문이었다.
'유럽 난민 위기'라는 표현이 헤드라인을 장식하던 2015/16년 무렵이었다. 유럽지역학 전공이던 나는 일부 유럽 국가들(특별히 독일)이 국경을 뛰어넘어 인도주의적인 난민 정책을 펼치려는 걸 보고 "저게 바로 '우리 것, 내 것' 울타리의 범위를 넓히려는 인도주의적인 움직임이겠구나!"하고 생각했다. 세계대전 이후, 끊임없이 국가 정체성 이상의 공동체 정체성을 추구해 온 유럽연합이 드디어 힘을 발휘할 때가 온 걸지도 모르겠다며 설레기도 했다.
독일처럼 애국심이나 국가 정체성을 금기시하는 나라에서 난민들을 향해 두 팔을 벌리려는 모습이 유독 '다정해 보였다.' 그 다정함이 메르켈 총리에게만 보이는 건지, 독일인 사이에서는 다른 건지 알아보고 싶었고, 비방과 칭찬이 난무하는 페이스북 댓글들을 두루 살폈다. 그때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를 미리 읽었더라면, '난민을 향한 친절과 폭력, 자기화와 타자화의 두 얼굴이 야누스보다는 아수라 백작에 가깝게 느껴졌다'라고 한 줄 더 적을 수 있지 않았을까. 친구가 말했듯, 묘하게도... '한 끗 차이'였으니깐.
누군가를 품에 안고 어를 수 있다가도, 그 사람의 눈을 품으로 가려버리고 우리를 향해 공격이 날아온다며 날카롭게 반응하는 것. 따뜻하지만 뜨겁기도 한 다정함의 모습은 바로 그런 게 아닐까.
위 감상 외에도 많은 것들이 떠오른다. '과학이 세상에 관심을 기울이면 이런 식으로 글을 쓰는구나'하는 놀라움(이때 <이런 식>이라 함은... 가설의 탑을 하나씩 쌓아가며 실험을 하다가 원하는 결과가 나왔다 싶으면 사회의 유명 예시와 함께 주장에 힘을 보태는 것...이랄까?)도 있었고, 다정함의 증표(?)로 언급된 손짓, 눈, 목소리 등에 관한 개인적 경험을 떠올린 것도 있었고, 타자화를 막아주는 우정의 위대함에는 동의하다가도 민주주의 체제의 중요성에 고개를 갸우뚱했던 것도 있었고... 아, 평소 좋아하는 엄유정 작가님의 표지 그림도 빼놓을 수 없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