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쯤 길들여졌으면 다행이지요

진저 개프니의 <하프 브로크>를 읽고

by 프로이데 전주현

#김영하북클럽 #11월의책 #진저개프니 의 #하프브로크. 말과 재소자들 그리고 훈련사가 서로를 변화시키는 일화로 가득한 이 책의 독후감은 말에 관한 나만의 말말말을 적는 것으로 대체해 보고자 한다.


말 하나: 백마.

백말 띠는 90년생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다. 초등학생이었던 우리를 향해 어른들은 종종 "백말 띠 여자애들은 드세다"는 평을 하며 혀를 찼다. 정작 당사자인 나는 '왕자님이 타고 오는 말이 바로 백마인데 박수를 쳤으면 쳤지, 쯧쯧할 건 또 무어 람, '하고 생각했고 일부러 스스로를 90년생 백말 띠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왕족이나 기사처럼 특수 계층의 친구가 되어 주는 녀석이라면 말 또한 특별한 존재이겠거니, 하면서 반발심이 솟구쳤다.


말 둘: 마초.

허옇고 뭉툭하지만 기다란 장난감 칼. 동네 문구점에서 그걸 사서 휘두르며 동네 아파트 단지를 누비던 시절이 있었다. 자축인묘 진사오미 신유술해. 12 지신을 외우게 해 준 꽤나 교육적인 만화 <꾸러기 수비대>를 챙겨볼 때였다. 아무래도 12 지신이 나오다 보니 자기의 동물 띠에 해당하는 캐릭터부터 먼저 살피게 되었다. 말 띠 캐릭터는 누구일까, 설레는 마음을 안고 만화를 보던 그때. 웬 기름진 멘트의 말 캐릭터가 너스레를 떨며 등장하는 게 아닌가. 심지어 이름까지 마초라고 지어진 녀석. <꾸러기 수비대>를 보는 내내 나는 영예롭게(?) 습득한 백말 띠 배지를 잠시 내려놓고 토끼띠 혹은 양 띠가 되자고 마음먹었다.


말 셋: 제주도.

내 안의(?) 말을 못 본 채 한 것도 잠시 가족여행으로 제주도를 방문했고 승마 체험장을 찾았다. 초등학생이었던 내게는 밝은 갈색의 조랑말이 주어졌는데 석이 나를 태우고서 갑자기 볼일을 보는 게 아닌가. 나를 태우고서도 그렇게 편할 수 있었던 건 무엇 때문이었니(개프니 선생님, 답을 알려주세요).


말 넷: 더 크라운.

그로부터 몇 년 후 코로나 팬데믹이 여행길을 막은 어느 해. 직장인이 되면 가장 먼저 유럽으로 휴가를 떠나려는 계획이 틀어지자 나는 스크린 안의 유럽을 찾아보기 시작했고, 영국 왕실의 일화를 다룬 <더 크라운>을 정주행 하기 시작했다. 사람인 듯 사람이 아닌 듯 그려지는 왕실 일원들이 유독 편안해 보이는 장면들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옆에는 말이 있었다. 엘리자베스 2세는 여왕이 되고서도 꾸준히 말 훈련사인 친구(알고 보면 구 썸남)를 찾아 대화를 시도했고 앤 공주는 선수 자격으로 승마 대회에 참가한 후 필립공과 부녀간의 포옹을 나눴다. 애청자였던 나는 '저 고집스러운 근육 뒤에 사람을 다독이는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야, ' 하고서 언젠가 가까이에서 말에게 당근을 건네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말 다섯: 하프 브로크.

김영하북클럽 최초로 클럽장님(작가님!)께서 다음 달 책이라며 예고편까지 올려주었다. '뭔데 뭔데, 무엇이 클럽장님을 기다리지 못하게 하고서 다음 달 책을 선공개하게 한 거지?'


책의 5분의 1 정도를 읽었을 때 클럽장님이 책을 읽기도 전에 판권을 사야겠다고 결심하신 이유가 뭔지 짐작이 갔다. <하프 브로크>의 등장인물들도 #10월의책 #나는강물처럼말해요 처럼 언어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소통의 도구로 삼고 용감히 스스로를 마주하려 했다(소통은 북클럽의 모토이자 운영 방식이 아닌가!). SNS 문화로 어느 때보다도 소통이란 표현을 많이 쓰는 어제오늘이지만 정작 소통의 무게는 경박한 스탭에 그친다는 걸 꼬집는 이야기처럼 읽히기도 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던 목장 사람들이 말 옆에, 진저 옆에, 서로의 옆에 서 있는 과정이 마치 영화 같다(영화로 만들어져도 좋겠다!). 누군가의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종종 소속감을 꼽는 나로서는 이지를 넘길수록 변화하는 인물들이 대견스럽기까지 하다.


이쯤 돼서 나는 내면의(?) 말을 다시 돌아보았다. 눈동자, 갈기 모양, 피부색과 거칠기, 걸을 때 발굽이 내는 소리와 안장의 버클이 채워진 구멍... 내 안의 말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나. 어쩌면 하프 브로크(반쯤 길들여진) 일지도 모른다(그정도도 감지덕지). 아카이빙의 시간, 12월이 코앞에 두고서 하프 브로크 라방을 기다리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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