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스터 거리를 걷는 문장
허수경 에세이 <너 없이 걸었다>를 읽고
#김영하북클럽 #12월의책 을 발표하려는 순간. 화면에 '사놓고 안 읽은 책'이라는 글씨와 함께 책으로 만든 탑 이미지가 띄워졌다. '오, 제목이 아주 현실적이야'라는 생각을 잠시 했으나, 12월의 책은 말 그대로 각 북클럽 회원들이 사놓고 읽지 못한/않은 책 중 하나를 '이번 달 책으로 해야지!'라고 지명하면 되는 것이었다. 하나의 북클럽, 제각각의 12월의 책이 생기는 것이다. 우선, 반가웠다. 한 해 성과를 정리하는 12월, 아카이빙 작업이 수두룩한 이번 달에 딱 어울리는 미션이었다. 책장에 꽂힐 공간을 잃은 (새 것 같지만 헌 것이기도 한) 책들을 바라보면서 '그래, 내가 그동안 너무 무심했지' 하고서 뒤늦은 아양을 떨 기회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난감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후보군으로 세워두고 읽어야 할까?' 하는 고민이 커졌다(그도 그럴 것이 너무 많았다 '사놓고 안 읽은 책'...)
그러다 눈에 들어온 한 권의 책이 있었다. 북메이트이자 인생 멘토인 선숙쌤께서 빌려주신 책이었다. #허수경 에세이 #너없이걸었다. '내가 아끼는 책이니 다 읽고 꼭 돌려줘야 해, ' 라며 점심 자리에서 내게 책을 건네주셨던 게 기억이 났다. 애정 하는 책을 빌려주기란 쉽지 않을 일인데, 라는 생각과 함께, 2022년에 다시 가질 점심 식사 자리에서 독후감과 함께 책을 돌려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겨울이 성큼 다가와 있었고, 겨울 하면 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나라, 독일이 드문드문 생각나던 때였다(2012년도 겨울학기, 나는 독일 마인츠로 교환학생을 간 적이 있다). 문장 속에서 가보지 못한 독일 뮌스터를 방문해 볼 수 있다는 생각, 그리고 멘토 쌤과 나눌 독후감을 기대하며 책장을 펼쳤다.
시인은 말의 밀도를 고민하는 사람이다. 압축적이고도 감각적인 표현으로 언어의 맛을 살리는 그들을 나는 요리사라 부른다. 간혹 시인이 쓴 장문의 글을 접할 기회가 있는데 그런 글은 마치 특식과 같다. 실험적이면서도 여전히 맛있다. 그래서 놓칠 수 없다. <너 없이 걸었다>은 허 시인의 특식이다. 장마다 독일 시인의 시가 한 편씩 번역되어 있는 것도 책의 재미를 키워준다. 독일 시를 읽은 허 시인이 뮌스터를 걸으며 고민했거나 느꼈던 것들이 적혀 있다. '장문의 글이라 조금은 시인의 '말 밀도'가 줄어들었으려나' 하며 부엌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지만 요리사의 기본기가 어디 가겠는가. 역시나 시인은 에세이마저도 묵직하고 복합적으로 풀어 나간다. 그 느낌이 독일의 거리 풍경(특히나 독일의 겨울 거리 풍경)과 썩 잘 어울린다. 특별히 조금은 덜 화려해도 계속해서 떠오르는 구시가지 어느 옷가게의 쇼윈도처럼 묘한 매력이 있다.
평소 '지저분하게' 책을 읽는 나로서 '누군가가 빌려준 책'을 읽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다. 수집하고픈 감정과 표현력에 당장 흑연의 줄을 그을 수 없다니! 아쉬울 대로 책상 서랍 안에서 놀고 있는 인덱스 하나를 꺼내 기억하고픈 책의 부분 부분을 표시해 둔다. 멘토 쌤에게 돌려드리기 전에 그 인덱스를 하나씩 떼면서 이 책과 뜨거운 이별을 할 수 있기를. 그리고 언젠가 뮌스터를 방문하기 전 이 책을 다시 들춰볼 수 있기를.
P.S. 쌤 멋진 책 감사합니다. 덕분에 12월의 결산 작업이 더 풍부해졌어요. "새해로 잘 미끄러지시길(!) 바랍니다(오해 마세요. 독일식 새해 인사니깐요. Guten Rutsch ins neue Jahr!)."
+ 가장 기억에 남는 장은 괴테의 시 <마왕>과 함께 뮌스터아 강을 걷던 11장인데, 읽는 내내 괜히 슈베르트의 <마왕>을 틀어놓고 긴장감 넘치는 독서 환경을 조성해 보는 재미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