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증조할머니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를 읽고
심윤경 작가의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를 읽고서 나의 할머니들을 떠올릴 수 있어 행복하다. 감사하다. 결코 당연한 일은 아니기에.
결혼식 피로연에서 “행복하게 잘 살아야 된다”하시며 손을 꼭 잡아주시던 외할머니도, 아빠의 콩나물국 레시피로 익숙한 친할머니도 있겠지만 할머니란 단어를 듣자마자 가장 먼저 떠올리는 사람은 나의 외증조할머니시다. 집안의 큰 어른이심에도 불구하고 중학생이 될 때까지 함께 사셨던 분이기에, 멀리 떨어져 계신 외할머니나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친할머니보다 더 친근한 분이시다. 상상만으로도 눈물이 고이게 하는 분이시다.
어릴 적 나는 증조할머니에게 쪼르르 달려가는 일이 많았다. 학교에서 상장이나 반장 임명장, 주로 두꺼운 종이에 금박 장식이 되어 있던 것들을 받아온 날이면 할머니 방으로 달려갔다. “어이구 잘했네”하시면서 손에 용돈을 쥐어주시는데, 그 돈은 주로 하굣길 떡볶이 만찬에 쓰이곤 했다. 삼시 세 끼로도 허기가 가시질 않을 때, 엄마가 연주회 일정으로 집을 비웠을 때, 붉은 라면 봉지 하나를 들고서 할머니께 가면 씩 웃으시며 뜨끈하고 짭조름한 한 끼 식사를 끓여주셨다. 하루는 할머니에게 짜장라면 하나를 들고 가 부탁드린 적이 있다. 라면 하나를 끝내주게 끓여주시던 할머니께서도 면수를 비워내고 비벼 먹는 조리법은 몰랐던 지라 검은색 국물이 흥건한 라면 한 그릇을 내어 오신 게 기억에 남는다. 이게 무슨 짜장라면이냐며 짜증을 냈더니 난감해하시던 표정까지도.
엄마에게 토라질 일이 있으면 할머니의 침대 위로 다이빙하듯 엎어지곤 했는데 그때마다 할머니께선 “왔나”하면서 가장 푹신한 침대 가운데 자리를 양보해 주셨다. 화 비슷한 것이 가라앉으면 손바닥만 한 텔레비전에 비디오 게임 팩을 연결하고 할머니 침대 위에 앉아 조이스틱 같은 것을 만지작 거리거나 할머니와 마주 보고 다리를 교차해서 쭉 뻗고 앉아 노래를 부르며 놀았다. 마음에 돋친 가시 같은 것이 뭉툭해지면 할머니 방을 나와 내 방으로 가거나 거실로 가 투니버스를 틀었다.
할머니의 방은 아파트 밖이 내려다 보이는 창문 베란다가 붙어 있었는데, 바로 그 창문에서 할머니는 노란 가방을 메고 등교하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셨다. 할머니는 내가 뒤를 돌아 아파트 7층 창문을 올려다보았을 때만 손을 흔드셨다. 등굣길에 ‘아 맞다, 할머니!’하고서 뒤를 잠깐이라도 돌아보던 건 그 때문이었다. 스쿨버스를 놓칠세라 앞만 보고 뛰어갈 때에는 할머니와 나만의 원격 인사를 나누질 못했는데 그 상태로 버스에 오르면 괜히 찝찝했다. 그런 날이면 하교 후 할머니 방을 가장 먼저 들여다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때도 “왔나” 하시면서 입을 앙 다무시거나 안경을 치켜올리셨다.
심윤경 작가가 어린이였을 때, 조금 더 머리가 커졌을 때, 꿀짱아의 엄마가 되었을 때, 순간순간마다 할머니를 떠올리며 삶의 지혜를 배웠듯, 나 또한 할머니의 요리, 말, 행동을 어느 방송국의 자료화면처럼 생동감 있게 재생하곤 한다. 물론 자료 화면에 먼지가 조금 껴 있을 수도 있고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 기억은 꺼내 볼 수록 왜곡 또는 미화된다고들 하니깐.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올릴 수 있는 할머니가 있다는 건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기에 어설픈 독후감을 남기는 와중에도 가슴 한편이 뭉근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