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난 채로 완벽하게 보존된

베를린 장벽에게 배우다

by 프로이데 전주현

아래 글은 2018년 9월 13일 목요일 주한 독일문화원에서 있었던 만프레드 박사의 강연 "Die Berliner Mauer im Wandel der Zeit:von einem Symbol des Kaltes Krieges zu einer globalen Ikone: 시대 변화 속 베를린 장벽: 냉전의 상징에서 세계적인 아이콘으로"을 듣고 작성한 것입니다. 글의 주된 내용은 강연 및 토론 중 필기해 두었던 것을 기반으로 하였습니다.




문화재 보존이란 주제는 꽤나 까다롭다. 문화재에 대한 가치 평가가 저마다 다르기에 논의할 사항들이 끊이질 않는다. 문화재의 가치는 따지는 방법의 대표적인 예로는 미학적, 예술적, 접근 혹은 과 역사적, 문명사적 접근, 그리고 그 두 접근이 교묘히 섞인 사회적, 건축학적 접근이 있다. 후자의 관점에서 볼 때, 베를린 장벽은 건축사에서 독특한 위상을 갖는다. 내부(독일)의 시선이 아닌 외부(외국)의 시선이 독일로 하여금 국가 문화재로 지정하고 보존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베를린 장벽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굴곡진 역사적 배경을 고스란히 담아낸 장벽에는 긍정의 이미지까지 담겨있다. 하지만 이제 막 장벽이 무너져 내렸던 독일에서는 장벽에 관한 긍정적인 인식이 생기기까지 20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독일인들에게 장벽은 (오래동안, 일부는 지금까지도) 분단을 떠올리게 하는 불편한 상징이었다. 언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긴장감과 공포라는 감정 그 자체가 바로 장벽이었다. 시위나 확성기, 라디오를 통한 상호 비방과 정치 선전이 난무하는 혼돈의 장소였다. 때문에 독일인들은 이에 관한 이야기를 가급적이면 피했고 가능한 한 장벽을 기억하지 않으려고 했다. 일부 사람들은 통일 독일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데 바빠 장벽이 지닌 역사적 의미를 반추할 여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장벽의 역사를 되새겨야 한다는 의견은 소수에 그쳤다.


그러나 동방 정책 (Ostpolitik)을 펼쳤던 빌리 브란트 총리는 이례적으로 장벽의 역사적 의미를 높게 샀다. 그는 독일이 미래 세대에게 남겨줄 유산이 바로 베를린 장벽과도 같은 역사적 건축물이라고 주장했다. 베르나우어 거리 (Bernauer Straße)에 위치한 ‘화해의 교회 (Versöhnungskirche)‘의 목사 또한 브란트 총리의 주장을 지지했다. (이 교회는 장벽이 무너지고 도로와 철로 등의 교통 시설망이 구 동독과 서독을 연결시키기 위해 복잡하게 설치되는 과정 중에 철거 위기에 직면했던 교회다. 장벽의 철거와 마찬가지로 이 교회의 철거를 놓고서도 의견이 분분하였다.)


그 후에도 장벽을 '가치 있는' 문화재로서 보존하느냐 마느냐 하는 논쟁은 계속되었다. 그러다 장벽 붕괴 15주년이 될 무렵, 베를린 장벽은 정부가 아닌 한 민간 박물관의 주도로 대내외적인 관심을 받게 된다. 미군과 소련군의 진영이 나눠지던 체크포인트 찰리에 세워진 ‘체크포인트 찰리(Checkpoint Charlie) 박물관‘이 바로 그 민간 박물관이다. 박물관은 장벽 붕괴를 기억하기 위해 한시적으로나마 추모공원을 세웠다. 나무 십자가가 빼곡히 들어서 있는 추모공원은 ‘자유의 기념관 (Freedom Memorial)‘이라고 불리며 장벽을 둘러싼 희생자들을 기리는 데 초점을 맞췄다. 추모와 장벽, 자유정신 등 좀처럼 독일인들의 입에 오르내리자 않던 주제가 공원으로 세워져 눈앞에 나타나게 되자 독일 사람들의 마음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특정 기간 동안에만 찾을 수 있는 추모의 공간이란 말에 독일 전역에서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이를 보러 베를린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장벽이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되자, (그제야!) 베를린 시와 독일 정부는 장벽에 관해 본격적인 논의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당시 민간 박물관이 맡기에는 다소 버거운 작업들이 하나둘씩 시작되었다. 역사학자들과 지질학자들, 수많은 장벽의 증인/목격자들이 동원되었고 학술적 접근을 중심으로 한 ‘2006년 베를린 장벽 마스터플랜 (Gesamtkonzept zur Erinnerung an die Berliner Mauer)‘을 시작하였다. 마스터플랜은 장벽과 관련된 대표적인 관광지를 지정하는 작업도 맡아서 했는데, 그 과정에서 프랑스와 소련 진영이 나누어졌고, 화해의 교회가 있었던 베르나우어 거리가 대표 관광 명소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국경의 기본적인 성격은 외부의 침략에 대비하여 쌓아 올려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베를린 장벽은 '내부 분열을 확정 지으려고' 세워졌다는 점이 마스터플랜에 참여한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하지만 연구 결과, 초창기의 장벽은 베를린 사람들의 생활 반경을 크게 침해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장벽이 다 커버하지 못하는 생활 반경들이 많았다. 엉성한 철조망으로 구분선을 그어놓았던 곳은 개구멍(?)을 통해 손쉽게 양 쪽 진영을 넘나들을 수 있었고, 마구잡이로 그어진 구분선 때문에 건물 안에 있을 땐 서독에 있다가 건물 밖으로 나오면 동독으로 넘어가 버리는 우스운 경계지역도 있었다. 그러나 점차 동서독 간의 경계가 심해져 가자 물리적인 장벽만큼이나 큰 비(非) 물리적인 장벽, 곧 마음의 장벽이 베를린 사람들의 삶 속에 자리 잡았다. 어느새 장벽은 나라 간의 구분 선이라는 역할을 넘어서 ‘죽음의 선'의 이미지를 띠고 독일 사람들의 마음속에 '해소되지 못한 응어리'로 남아있게 된다.


그러나 점차 전쟁과 분단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가 점점 더 많은 독일 인구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자기소개에서 꼭 물었던 질문 - ‘너 동독 출신이야, 서독 출신이야?‘ - 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른바 '신(新) 베를린 시대'가 도래했고 이에 따라 장벽에 관한 인식 또한 바뀌기 시작했다. 장벽을 둘러싼 공포와 억압의 이미지는 평화와 자유의 이미지로 변해갔다. 점점 더 많은 젊은이들이 혁명처럼 급진적인 변화나 벌건 피와 같은 희생 없이도 변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장벽을 문화재로 인식하고 그에 과거를 뛰어넘는 현재와 미래의 메시지를 함께 담아 의미 부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통일 독일을 넘어서 유럽 공동체/연합 속의 독일을 염두에 둔 독일 미래 세대의 생각이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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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East Side Gallery


장벽에 대한 관심이 늘어남에 따라 재미난 풍경도 목격할 수 있게 되었다. 무너져 내린 장벽의 조각조각을 하나씩 주워 기념품으로 내다 파는 사업이 흥하기도 했고, 많은 사람들은 예전 유럽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파편을 찾아다녔던 것처럼 장벽의 조각을 모으러 다녔다. 여담이지만 장벽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은 서독 쪽에서만 가능했기에 분단 당시 그라피티(graffiti) 등의 낙서가 새겨져 있는 쪽은 서독 쪽의 장벽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장벽 조각 기념품을 살 때 화려한 색깔이 많이 묻어나 있는 파편 조각이 더 비싸게 팔렸다고 한다. 통일 이후에는 동독 쪽에서도 장벽에 접근이 가능했기에 신 베를린 시대에는 동독 쪽의 장벽들도 형형색색으로 장식되었다. (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오늘날의 동(東) 베를린 역 근처에 위치한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East Side Gallery)‘이다.) 장벽은 평화의 메시지를 담은 채 대형 벽면 통째로 전 세계로 흩어졌다 일례로 서울의 청계천에 조그맣게 마련된 베를린 광장에도, 나토 본부 앞에 세워진 9.11 테러 이후의 현관 구조물 옆에도 장벽 한쪽(?)이 세워져 있다. 원형을 유지하는 동시에 분리된 건축물이라니, 건축사에 길이 남을 사례이지 않을까.


장벽에 관한 긍정적 인식은 퍼포먼스적(performative)인 추모/기억 방식 또한 고안해 냈다. 불편한 유산을 기억해 내는 방식 중 하나로 축제와도 같은 시민 참여적 순간들을 마련해본 것이다. 베를린 장벽 25주년을 기념하던 2014년에는 베를린은 장벽이 세워졌던 자리를 따라 불이 들어오는 풍선을 배치했다. 장벽 붕괴를 염원하던 당대의 평화 촛불 시위대의 이미지를 현대 독일의 수도 곳곳에 연출했다. 풍선들은 전시 기간이 끝난 뒤 하늘로 날려 보내졌는데 이는 장벽에의 부담감을 덜어 버린 독일의 심리를 시각적으로 나타내었다는 호평을 받기도 했다.


독일의 통일과 한국의 통일은 분명 다른 모습을 띠고 있다. 하지만 두 경우 모두 분단에의 공포와 아픔을 실감한다. 그리고 분단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가 점점 더 많아지면서 등장할 수 있는 변수들을 감수해야만 한다는 과제를 떠안고 있다. 한국이 독일 통일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두 가지 이유만으로도 충분하다. 독일에 베를린 장벽이 있었다면 한반도에는 무엇이 있을까? 미지의 땅이 되어버린 비무장지대가 바로 그 장벽의 상징성을 띨까, 남북 정상이 손을 맞잡았던 판문점이 바로 그 아이콘이 될까? 통일 한국이 분단이라는 불편한 유산을 지혜롭게 기억하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베를린 장벽 재단의 만프레드 비히만 (Manfred Wichmann) 박사는 작은 시도부터 시작하라고 조언해준다.


“완벽하게 유산을 재현한다든지 전시할 필요가 없습니다. (...) 추모의 대상을 정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할 수 있는지부터 시작해서 하나하나 따져보세요. (...) 기억의 과정과 결과물들이 관광 상업주의에 빠지지 않기를 계속해서 경계해야 할 겁니다. (...) 누가,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왜 기억하는가를 질문해보세요. (...) 무엇보다도 분단 이후의 평화 그리고 통일의 시대를 준비하는 작업에 세대 간의 지속성(Nachhaltigkeit)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 가치관처럼 보이지 않는 요소들이 여러분 들의 머릿속에 새로운 장벽을 쌓아두고 있진 않은지 되돌아봐야 합니다." - 만프레드 비히만 박사


국제 정치는 손익을 따지는 고질적인 습관을 지니고 있다. 한국 또한 그 습관의 굴레에 깊이 관여하고 있기에 통일을 그저 오래 염원하던 소원으로만 접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불편함에서 시작된 관계를 그저 그대로 내버려 두기에는 평화가 무너뜨릴 수 있는 장벽들이 너무나도 많고 세워나갈 수 있는 가치들이 수두룩하다. 불편하더라도 만나고, 기억하고, 이야기하려는 과정들이 끝없이 이어져야 함은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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