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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Sep 18. 2020

20.베토벤, 거리의 악사로 본의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다

비창 소나타 3악장의 소년

16.12.12 월요일



오늘부로 출판사로 첫 출근을 하는 AL과 아침 일찍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지난밤 쿠키 대잔치를 벌이고서 한동안 AL의 첫 출근 복장을 고르느라 떠들썩했었는데, 그때 골라둔 옷을 단정히 차려입고 출근길에 오르는 친구를 보니 뭔가 찡했다. A는 나를 쾰른 대성당까지 데려다준다고 하면서 함께 중앙역으로 가주었다. 아침의 쾰른은 화려한 조명으로 뒤덮인 밤의 쾰른과 달랐다. 중앙역에 내리자마자 A는 다짜고짜 나를 'dm(독일식 올리브영, 독일 드럭스토어의 대명사)'으로 끌고 가서 자신이 요즘 빠져 있는 '칠리 다크 초콜릿'을 꼭 사주고 싶다고 간식 코너를 마구 뒤졌다. 칠리와 초콜릿이라니 두 조합이 상상도 가지 않던 나는, 초콜릿 한 입을 베어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떡볶이 후에 단 거 챙겨 먹는 그 맛이군!'


오늘은 A 자매 없이 나 홀로 독일을 여행하는 날이다. 이틀간 쾰른을 구경했으니 오늘은 쾰른에서 20여 분 기차를 타고 가면 도착하는 베토벤의 도시이자 구 서독의 행정 수도인 '본(Bonn)'으로 가보기로 했다. 반나절 동안 본에서 나 홀로 여행을 한 뒤에 뤼벤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고서 저녁 아홉 시 무렵에 도착하는 걸 목표로 삼아두었다. 칠리 초콜릿을 내 손에 쥐어준 A는 승강장에서 나를 배웅하며 'Auf wiedersehen(또 보자)!' 하고 인사했다. 




중앙역에서 바라본 쾰른 대성당의 모습. REWE에서 산 커피 한 잔에는 'schlcht gschlfn(schlecht geschlafen: 잠 잘 못잤어)?'하는 문구가!



A 자매가 본이라는 도시의 이미지가 꽤나 지루하다며 일찍이 내 기대감을 낮춰준 덕분에, 혼자서는 나름 만족하며 본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기대감이 높으면 그만큼 실망감도 높으니까). 회색빛의 건물들이 유독 많이 보였지만, 구 시가지 곳곳에 위치한 베토벤 동상 덕분에 음악과 함께 하는 여행이란 콘셉트로 비창 소나타를 반복해 들으며 이곳저곳으로 걸어보았다. 


비창 소나타 3악장을 즐기게 된 건 초등학교 6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학교 대강당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한 대 있었는데, 그곳에서 짝꿍인 S와 장난을 치며 놀다가 대뜸 S가 피아노 의자에 앉아 내게 연주를 해주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연주한 곡이 바로 비창 소나타 3악장. 피아노를 공부한 엄마의 작업실에서 자주 들려오던 선율이었다. 피아노를 칠 때, S의 피부가 얼마나 뽀얗게 보이던지! S와 같은 조로 편성되어 <백설공주> 연극을 준비할 때, (비록 S가 남학생이었지만) S를 공주로 케스팅 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TMI 하나, <백설공주> 연극 시, 나는 (믿거나 말거나) 화려한 연기력을 뽐낼 수 있는 마녀로 케스팅 되기를 자처한 이력이 있다.) '피아노 곡을 선물해주는 S에게 조금은 반했었지. 그랬지.' 이런저런 사연이 있는 음악을 베토벤의 도시에서 듣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본의 크리스마스 마켓은 구시가지의 중앙광장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한낮에 즐기는 마켓도 차분한 매력이 있었다.

중앙광장에 설치된 크리스마스 마켓을 잠시 구경하다가 이 도시의 '크리페(Krippe)'가 성당에 설치되어 있다는 설명 문구를 보고선 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본의 크리페는 지금껏 내가 마주한 독일 크리스 마켓 크리페 중에서 가장 신선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와 현재의 본을, 그것도 본의 일상적인 모습과 대표 건물들과 함께 연출해 냈기 때문이다. 


종이 및 미니어처 공예 같아 보이는 본의 크리페에는 거리에서 반도네온을 연주하는 베토벤까지 장식되어 있었다. 거리의 악사가 된 베토벤은 상징과도 같은 붉은 스카프에 하얀 셔츠, 검은색 코트를 입고 있었고, 특유의 심각한 표정으로 크리스마스 거리를 누비는 본 시민들을 위해 묵묵히 연주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 도시는 정말 베토벤을 사랑하고 있구나.'


 










To. Readers 

우리에게(uns, [운스]): 여담이지만 내게 비창 소나타 3악장을 연주해 준 S를 대학생 때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잊고 지낸 초등학교 동창들을 다시 만나게 해주는 어플을 통해서 S와 연락이 닿게 된 거다.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10년이 훌쩍 넘어버린 세월 때문에 덜컥 겁이 났다. 기억 속의 S가 혹여 지금의 S와 너무 많이 달라진 나머지 이전의 좋은 기억들이 훼손된다면? 종이 위에 건 머릿속에 건 무언가를 끊임없이 기록하는 내게 지난 좋은 기록의 훼손은 큰 두려움이다. 때문에 S와 나는 안부 인사로 그렇게 모니터 뒤에서 재회하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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