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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Apr 13. 2023

피카츄를 되찾아줘

월간 지음지기: 2023년 4월 "놀이터 바닥"


'드디어 나도 중급반이군.' 어깨를 으쓱이며 아기스포츠단 출신의 초등학생은 '수영장 냄새'라 부르던 소독약을 씻어냈다. 곧게 뻗은 채로 물 안팎으로 원을 그리며 나아가던 자유형 팔동작이 구부렸다가 펴는 동작으로 바뀌었을 때의 짜릿함에 심취했다. 하지만 잠시 뿐이었다. 수영 수업은 끝났고, 더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방금 전까지 물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던 팔을 보도블록 위에서 빙빙 돌리며 집 앞까지 데려다줄 셔틀버스를 향해 달렸다. 셔틀버스 안에서 친구들과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중요한 일이었다.


피카츄가 얼마나 귀여웠는지, 로켓단삼총사가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최근 에피소드에서 새로 등장한 포켓몬이 막강한지 그렇지 않은지... 봉고차 안에서 친구들과 나는 당대 최고의 애니메이션이었던 포켓몬스터에 관한 비공식 포럼을 가졌다. 포켓몬 이름을 하나씩 대면서 포켓몬 지식을 뽐낼 수 있는 자리이자, 피카츄와 라이츄는 별개의 포켓몬으로 카운팅 하며 포켓몬의 진화 체계를 복습하는 시간이었다. 포켓몬 세계관은 또래 사이에서 일종의 교양 지식 취급을 받던 것이었다. 자유형 수업보다 훨씬 더.


90년대 말, 2000년대 초, 초등학생들의 가방과 주머니엔 포켓몬이 빠지질 않았다. 필통과 학종이, 가방, 짱딱지... 그중에서도 수집 요소가 높은 베틀 카드는 인기가 꽤 높았다. 선생님들이 학교에 '그런 것들'을 가져오지 말라며 여러 번 주의를 주었지만 소용없었다. 학생들은 쉬는 시간마다 자신의 포켓몬 수집품을 자랑하느라 바빴는데, 수업 종소리를 들은 체 만 체하고서 놀다간 선생님께 고스란히 '보물'을 넘겨드려야 했다. 압수당한 포켓몬 물건을 돌려받으려면 교무실에서 한동안 야단을 맞아야 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서.




초등학생 시절의 추억으로만 남을 줄 알았던 포켓몬 시리즈는 여전히 연재 중이다. 분명 '어른'이라 불리며 지내고 있는데 조카 뻘 되는 어린이와 편히 대화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이 있다니, 그리고 그게 바로 포켓몬이라니! 가슴이 괜히 웅장해진다. 스포츠 플라자의 셔틀버스를 탄 지 오래되었는데. 여전히 거리에선 포켓몬 굿즈가 판매되고 있고 그새 포켓몬이 '고전, 명작' 취급을 받고 있다니. '나이를 먹긴 먹었구나' 하며 묘한 웃음을 짓는다. 오리지널 시리즈의 주인공인 지우가 연재 26년 만에 포켓몬 마스터 우승컵을 거머쥐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잊고 지낸 오랜 친구의 근황을 전해 들은 기분이 들었다.


챔피언이 된 지우와 오랜 포켓몬 팬들을 위한 일종의 헌정 시리즈인 <노려라 포켓몬 마스터>의 연재 소식을 들은 그날은 겨울도 봄도 아닌 날이었다. 봄바람이라기엔 꽤나 거셌던 바람 때문에 빠른 귀가만을 목표로 몸을 한껏 웅크리고 걷고 있었다. 이제 막 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를 지나치고 있었고, 그는 곧 집에 도착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그때, 바람에 휘릭 날리는 무언가를 보았다. 우레탄 재질의 말랑말랑한 놀이터 바닥 위를 불규칙적으로 덮은 물건, 자세히 보니 포켓몬 배틀 카드였다. 돈과 시간을 써서 모았을 카드 더미가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는 모습은 꼭 방 안을 뒤엎은 범죄 현장 같았다.


'누가 이 귀한 걸 여기다가!' 눈에 익은 1세대 포켓몬의 그림도 보였고, 전혀 모르는 최신 세대의 포켓몬 카드도 함께 그려져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몇 개는 찢겨 있었다. 가지런히 정리해 놀이터 구석에 놔두자니, 찢겨 있는 몇몇 카드가 눈에 걸렸다. '고민 끝에 버리기로 한 걸 수도 있잖아. 그렇다면 굳이 정리해 줄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다시 들고 가라고 유혹을 하는 건 아닌가? 하지만 잊어버린 거라면? 잃어버린 거라면? 누군가 카드 주인에게 못된 장난을 친 거라면?'


어린이와 공유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무도 없는 놀이터에서 뒹굴다가 찢기고 밟힐 생각을 하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곧 있으면 해가 길어질 테고, 카드 위로 놀이터 기구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울 테고. 분실품인지 폐기물인지 모를 카드 더미가 수집가 주인의 눈에 띌 가능성은 줄어들겠지.' 발을 동동 구르며 한동안 놀이터를 지켰다. 그러나 수집가 주인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날, 놀이터는 깨끗해져 있었다. 이도 저도 아닌 계절의 바람에 날아간 건지, 환경미화원이 치운 건지. 나는 어른의 손을 잡은 어린이 수집가가 늦은 시간이 되어서 놀이터를 다시 찾았기를, 어른의 도움으로 카드를 하나씩 주워 가져갔길 바랐다. 기왕이면. 가능하다면.




 





위 글은 지음지기의 프로젝트 ㄴ(니은)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놀이터 바닥"을 보고 다른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낸

지음지기의 그리는 사람(최정연 작가)의 작품이 궁금하다면 아래 링크를 확인해보세요!

<뒤늦은 만남>, 최정연 : https://m.blog.naver.com/choijungyon/223073247252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drawnnwritten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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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그리고 씁니다. 개인의 일상을 연결합니다. 이대로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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