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에게서 사람의 얼굴을 볼 때가 있다. 새로운 차원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신호 같은 것이 그 사물을 통해 내게로 전달되는 기분이다. 동물원 전시장의 뱀과 눈빛을 주고받더니 처음으로 마법과 독대하는 해리포터나 오랜 모피 코트를 보관한 옷장에 묘하게 끌리더니 나니아 연대기의 문을 연 루시가 떠오른다.
하지만 방금까지 표정 비슷하던 걸 짓던 사물은 안타깝게도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는 듯 입을 꾹 닫고 나를 모른 체한다. ' 2023년의 한국이지, 참' 하면서. 물건과의 대화가 끊기자 상상도 멈춘다. 사물과 나, 오로지 두 오브제만이 남는다. '돌아온 건가' 하는 생각을 하는 건 그때부터다. 오늘도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못했다. 판타지 소설 같은 일상을.
사물과의 대화라니, 어린 시절의 놀이 같은 건 아니냐고 누군가 묻는다. 아니요, 지금도 일어나는 일인데요. 나는 최근 방문했던 케이크 가게의 전등을 떠올렸다.
한두 입이면 손에서 사라져 버리는 작은 케이크를 판매하는 곳.전등은 포장대 옆 계산대 위에 달려 있었다. 전체적인 실루엣이 볼주머니에 식량을 가득 담은 다람쥐를 닮았었는데 위쪽에 땡그란 동그라미 두 개까지 눈처럼 달려 있어 꽤 그럴싸한 상상이었다. 진한 목조 건물을 구석구석 밝히기보다는 듬성듬성 비추는 빛을 발하고 있었고빛깔은 오렌지 크림색이었다. 다람쥐의 털 색깔을 닮은 빛, 가을날의 산책로를 뒤덮은 낙엽의 빛. 눈을 편안케하는 색이었다.
겨울철 난로가에 앉아 바닥에 일렁이는 불의 그림자 같은 것을 보는 기분이었다. 난로가처럼피부에 직접 와닿는 온기는 없었지만마음 깊숙이 따스함 같은 게 전해졌다.그때였다. 전등이 볼주머니를 우물우물 움직이더니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린 내게 무언가 말을 하려던 건.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결제 완료되었습니다" 하는 가게 점원의 말이 우리 둘 사이를 끼어들었다. 결제 카드를 챙기라는 점원의 손짓에 전등은 단념하는듯한 표정을 짓더니 고요히 빛을 발하는 데 다시 집중하기로 했다. '이번에도 아니군.' 케이크 포장 봉투를 건네받고서 터덜터덜 가게를 나왔다.다음을 기약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