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지음지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프로이데 전주현 Apr 27. 2023

누군가의 청바지 인터뷰

월간 지음지기: 2023년 4월 "청바지 클로즈업"

뻣뻣하다. 차갑다. 생각보다 두껍다. 그래서 단단하다. 사계절을 견디게 해 주니 믿음직하기도 하다. 바지에 관한 나의 데이터다. 어디 그뿐인가. 제2의 교복이기도 했다. 주일학교엔 가장 좋은 옷을 챙겨 입고 가야 한다던 엄마가 어린이 정장 같은 걸 챙겨줄 때 나는 옷장에서 슬그머니 청바지를 꺼내 입었다. 현장학습이나 소풍, 수학여행 등 다양한 이름의 학교 행사를 준비할 땐 교복에서 벗어난다는 기쁨에 가장 먼저 청바지부터 챙겼다.


지금껏 나와 함께한 청바지들의 시점에서 이야기 한 편을 쓴다면 꽤나 적나라한 일상 고발문이자 발칙한 여행기가 될 거다. (그러니 쓰지 않겠다. 하하.)




나이가 두 자릿수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을 무렵, 처음으로 찢어진 청바지를 입었다. 자칫 융통성 없어 보일 수 있던 군청색 데님 숨구멍 같은 걸 뚫어 놓은 듯한 디자인. 멋있다기 보단 웃겼다. 어느 생명체의 핏줄처럼 질서 정연하게 드러난 흰색 실들이 신기해 몇 번이고 손으로 쓱 훑기도 했다. 


누군가가 그때의 심정을 물었다. 낯선 이는 아니었고, 줄곧 마이크를 건네는 사람이라고 지칭하는 존재, 이를테면 삶 속의 질문자 같은 존재였다. 평소처럼 덤덤히 대답하는 쪽은 나였고 눈을 반짝이며 호기심을 표출하는 쪽은 누군가였다.


"그때 그 흰색 실들이 모여 있는 모양이 꼭 아프리카 대륙 같았었어. 주변은 데님 천을 닮은 바다였고. 어느 건국 신화의 절대자처럼 대륙을 어루만졌는데, 그게 다름 아닌 내 손이라는 게 신기했어. 기타 줄을 튕기듯 찢어진 부분을 문질렀지. 생각해 보니 난 기타를 손에 쥐어본 적도 없는데 말이야. (...) 청바지가 감싼 맨살이 손 끝에 닿아 아차차 하고선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어. 신화가 종지부를 찍고 아홉 시 뉴스가 시작된 셈이지."



여전히 찢어진 청바지와 함께 하는 하루. 재미난 발견을 했다. 발견 내용은 이러하다. 인간은 아예 드러낸 것은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 어쩌다 드러난 것에 얼굴을 붉힐 때가 있다고. 맨발에 신는 샌들과 신을 벗고서야 드러난 구멍 난 양말이 그러하고, 애초에 뻥 뚫려 있던 청바지의 숨구멍과 흰색 실들로 간신히 덮어두었다가 찢어져버린 청바지의 숨구멍도 그러하다. 


발차기라도 하듯 온 힘을 다해 바지를 입었던 아침이 하루이틀이던가. 그 발차기가 한 번, 두 번,... 그러더니 결국엔 뻥! 커다란 구멍이 되었다. 발차기에 끊어지고 바깥으로 돌출된 흰색 실들의 조각, 단면 같은 것들이 보였다. 걸을 때마다 너풀거린다. 단정치 못한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해 보였다.


누군가가 나타나 아프리카 대륙 같다던 청바지 무늬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부주의했어."

짧은 답변에 누군가가 마이크를 한번 더 얼굴 쪽으로 들이밀었다. 나는 부연 설명을 이어가기로 했다.


"바지를 입는다는 건 모험이잖아. 그걸 반복하다 보니 더 이상 모험이 아니라 생각하고선 행동이 거칠어진 거야. 길고 긴 데님 터널은 바다고, 그 바다를 통과해야 할 나의 하체는 탐험선 같은 거야. 풍랑을 가르며 바다를 누비는 탐험선. (...) 숨구멍 근처는 약해. 섬세해. 때문에 다섯 발가락을 길고 날카롭게 모아 포인 하고선 부드럽게 지나가야 하지. 일종의 항해 프로토콜이야."


누군가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하자 나는 고개를 떨구고 답을 이어갔다. "그런데... 그런데 반복되는 일상에 바다를 잘 안다고 방심하는 날이 많아진 거야. 탐험선과 숨구멍이 계속 부딪혔지. 그리고 충돌이 쌓여서 터져버린 거지."


침을 꼴깍 삼켰다. 그 자리에는 아무 맛도 나지 않는 목구멍과 너풀거리는 흰색 실들 조각을 내려다보는 내가 있었다. 누군가는 마이크를 정리하며 신나 보였다. 분량을 뽑았다면서, 초안을 쓸 일만 남았다면서.








위 글은 지음지기의 프로젝트 ㄴ(니은)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청바지 클로즈업"을 보고 다른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낸

지음지기의 그리는 사람(최정연 작가)의 작품이 궁금하다면 아래 링크를 확인해 보세요!

<눈맞춤>, 최정연 : https://blog.naver.com/choijungyon/223085343461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drawnnwrittenby/ 

포트폴리오:



"함께 그리고 씁니다. 개인의 일상을 연결합니다. 이대로 괜찮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계속되지 못하는 대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