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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Apr 06. 2023

빨강을 마지막에

월간 지음지기: 2023년 4월 "사과가 있는 풍경"

빨갛고 하얀 체크무늬 식탁보 위에 유리그릇을 얹고 그 위에 둥글고 빨간 사과를 올려놓았다. 빨강 위에 빨강. 반복을 두려워하지 않다니, 과감하고 용기 있는 상차림이다. 종이 위에 차려진 식탁이지만 허기를 채우고, 사진을 남기고, 호불호라 불리는 마음의 탑을 쌓기 시작하기에는 충분해 보인다.


식탁에는 응당 먹을 게 있고, 먹는 데는 오감이 뒤따라오니, 뭐든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러다 입맛을 다시는 횟수가 많아지면 근처 식당을 찾으려고 지도 앱을 켤 수도 있고, 함께 먹지 않겠느냐고 누군가에게 말을 건넬 수도 있다. 기왕이면 그때 그 누군가가 아무나가 아니길 바란다.


빨강은 즐겁다. 대체로 맛있는 편이다. 후르츠 칵테일 통조림 캔만 봐도 그렇다. 노랑 열대 과일 조각들이 바다처럼 펼쳐져 있는데, 드문드문 바다를 밝히는 붉은 과육이 보인다. 살만 깔끔하게 발라낸 체리다. 노랑을 먹는 사람은 많지만 빨강을 먹는 사람은 소수에 그친다. 어쩌면 한 명일지도 모른다. 짜릿하게도.


어쩌다 후르츠 칵테일이 급식 메뉴로 다섯 개의 식판 칸 중 하나를 채울 때면, 체리를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를 두고선 친구들과 내기를 하곤 했다. 체리를 배급받은 친구들은 다시 빨강을 가장 먼저 먹는 그룹과 아껴두었다가 맨 마지막에 먹는 그룹으로 나뉘곤 했다. 어느 쪽이었냐고 묻는다면 나는 후자에 속했다. 빨강을 마지막으로 먹고선 휴지로 입가를 쓱 닦아 냈을 때 붉은 무언가가 묻어 나오는 걸 확인하고 싶어 했다. 기다림 끝에 무언가를 누리는 건 즐거움을 넘어서 통쾌함을  선사해 주었고, 그 무언가가 빨강일 경우 맛이 배가 되었으니깐.


중학교 시절, 옆집에 사는 친구와 함께 '공부를 하자'며 만났을 때도 그랬다. 이때 '공부를 하자'는 약속은 한 방에서 과목별 숙제를 하고, 컴퓨터가 있는 방으로 자리를 옮겨 크레이지 아케이드를 함께 하는 것까지의 일정을 의미했다. 당장 키보드 앞에 앉아 물풍선을 쏘아대는 건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그렇지만 해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발목을 잡을 바에야 숙제를 '해치우고' 늦은 시간까지 맘껏 놀자며 엉덩이가 무거워지도록 책상 앞을 지켰다. 그렇게 '공부를 하니' 빨간 옷의 배찌 캐릭터로 금세 황금 비행기 레벨에 도달다. 








위 글은 지음지기의 프로젝트 ㄴ(니은)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사과가 있는 풍경"을 보고 다른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낸 

지음지기의 그리는 사람(최정연 작가)의 작품이 궁금하다면 아래 링크를 확인해보세요! 

<카페에 앉아>, 최정연 : https://blog.naver.com/choijungyon/223065621740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drawnnwritten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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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그리고 씁니다. 개인의 일상을 연결합니다. 이대로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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