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의 편에서

베를린, 독일

by 프로이데 전주현

궁극적으론 같지만 장소에 따라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영웅을 베를린에서 자주 만났다. 그는 흉이 난 상처 자국이 소매 바깥으로 삐져나오든 말든 있는 상관 않고 가진 옷 중에서 가장 아끼는 옷을 챙겨 입는다. 각종 훈장을 가슴팍에 질서 정연하게 달면서 외출을 준비한다. 오늘도 역사를 증명해 내고 드러내야지, 하고서 거울을 보며 현관을 나서기 전 최종적으로 스스로를 점검한다.

영웅의 뒤를 따라 걸으니 어느새 베를린 동역에서 내리고 있다. 이곳에 도착한 대부분의 방문객이 그러하듯,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East Side Gallery)라 불리는 베를린 장벽으로 향한다.


평화를 향한 메시지가 가득 그려져 있는 장벽이다. 그라피티만의 거침없는 표현 방식에 압도당하는 기분이 든다. 지금이라도 벽이 내 쪽으로 무너져 내릴 것만 같다.

벽을 뒤덮은 메시지를 하나씩 읽는다. 소리 내어 읽었을 때 입 안에서 또르르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문장도 보인다. 발음 연습을 하는 건지 장난을 치는 건지 쉽게 구분이 가지 않지만 재미있다. 여러 번 읽게 된다. 어느새 문장도 분석하고 있다. 강독 시간 아니랄까 봐, 한참 공부 중인 프리드리히 쉴러의 얼굴이 장벽 한 면에 나타난 것을 본다. 쉴러와 괴테, 아인슈타인이 나란히 그려져 있는 벽 앞에서 곧 있을 기말고사 범위를 잠시 추측한다.

언제 저기까지 간 건지. 앞서 걷던 영웅이 뒤를 돌아 내게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무어라 외치는데 소리가 잘 들리진 않는다. 표정이나 몸짓의 분위기로 보았을 때 아직 볼 게 많이 남았다며 서두르는 걸지도 모른다. 아차 싶은 마음에 <형제의 키스>가 있는 곳을 향해 다시 걷는다. 벽이 참 길다.




*쿠델무델 (Kuddelmuddel): 독일어로 '뒤죽박죽'이란 뜻의 형용사
*프로이데 (Freude): 독일어로 '기쁨'이란 뜻의 명사. 나의 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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