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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Mar 09. 2024

와이너리 모의고사

산지미냐노, 이탈리아

주말을 제대로 즐기는 이탈리아 사람들은 피렌체 근교 와이너리에 있다고 하니, 현지 문화도 체험할 겸 일일 가이드를 따라 산지미냐노 근처의 한 와이너리를 방문해 보기로 했다. 와인에 일가견은 없지만 투어 프로그램의 설명란에 와알못을 위한 일정이라고 적혀 있었으니 괜찮겠거니 하면서.

등나무 아래, 야외석으로 안내를 받았다. 하얀 식탁보 위엔 예약 단체 손님을 위한 테이블 세팅이 다 되어 있었는데, 바로 앞에 놓인 잔의 개수만 다섯이 훨씬 넘었다. 괜히 긴장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와이너리 관계자 할아버지께서 오시더니 와인을 즐기는 방법을 주제로 강의를 시작하셨다. 열 가지의 와인을 맛보게 될 거라는 선포와 함께, 오늘의 와이너리 투어 상세 프로그램부터, 잔을 받는 순서, 잔을 입으로 가져가기 전에 와인의 향에 대해 예의를 차리는 방법, 스월링, 잔을 옮겨 쥐는 방법 등...

꽤나 알찬 구성의 강의였다. 한 가지 흠이라면 강의자이신 할아버지께서 던지는 질문에 가벼운 농담을 담아 답을 하더라도, 할아버지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으셨다는 거다. 뭐랄까, 유머를 받아들이거나 섞어가면서 강의를 진행할 정도로 여유로워 보이시진 않았다. 그 모습이 주변 풍경과 대조를 이루어 괜히 안타깝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늘은 너무나 맑고 높았고 찬란했고, 들리는 소리는 와이너리 방문객들의 대화 소리와 잔을 부딪히는 소리뿐이었다. 고요한 햇살, 익을 대로 익은 포도향. 평화의 기운이 가득했다.

강의 후에 할아버지는 테이블에 앉은 한 명 한 명에게 커다란 도표를 나눠주셨다(꼭 모의고사 답안지 같이 생겼다. 가독성 제로...). 와이너리에서 취급, 판매하는 와인의 이름과 정보가 정리되어 있었는데, 대충 여기서 사면 할인도 많이 해주고 다른 데선 못 사는 제품도 많다는 게 핵심이었다. 목록 중에 오늘 당장 맛볼 와인에는 별도의 표시를 해두었다며 와이너리의 수고로움을 강조했고, 오늘 함께 맛볼 와인의 서빙 순서를 가르쳐 주겠다며 포크 옆에 놓은 볼펜을 들어 1부터 10까지 넘버링을 지시했다. 갑자기 시작된 또 다른 주제의 강의에 깔깔 웃었고, 교복 입던 시절처럼 할아버지 선생님의 지시사항에 잠시나마 집중했다.

도표 뒷면에는 메모를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하도 많은 와인을 마시는 바람에 첫 번째 마신 와인의 맛이 어떠했고 마지막에 마신 와인의 맛이 어떠했는지를 까먹을 경우를 대비한 공란이라고 한다. 일종의 와인 감상문란이랄까. 뭐 이렇게까지 진지하게,라고 생각할 즈음 할아버지 선생님께서 다시 한번 강단에 오르셨다. 이제 첫 번째 와인부터 따라줄 거라고 선포 아닌 선포를 하셨다. 프린트물에 볼펜까지 챙긴 후에 마시는 와인이라니, 어느 필기시험장에 입실한 건지, 와이너리에 놀러 온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쿠델무델 (Kuddelmuddel): 독일어로 '뒤죽박죽'이란 뜻의 형용사
*프로이데 (Freude): 독일어로 '기쁨'이란 뜻의 명사. 나의 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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