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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Oct 24. 2024

9화. 기회가 생기다

갈매기 마을 이야기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휴대폰 스피커 구멍에서 들렸어.


  “그래서 형님만 못 들어가고 문전박대당했다 그 말이지?”


  “아니, 뭐, 문전박대까진 아니고, 그냥 못 들어갔단 거지. 근데 또 현서만 있던 것도 아니고, 다른 아이들도 같이 와 있었거든. 태풍이 더 거칠어지기 전에 걔들 집에 보낸다고 전화 돌리느라 바빴지.”


  하숙집 아주머니가 금귤 아주머니와 전화 통화 중이었어. 그런데 어쩐 일인지 하숙집 아주머니가 더 수다스러웠지. 전화 내용을 들어보니, 현서가 조각가의 작업실로 홀랑 들어가 버린 이후로, 작업실 문은 한동안 꽉 닫혀 있었대. 현서를 따라왔던 아이들이 문을 두드리고 현서의 이름을 부르면서 소동을 부렸지만, 이따금 갈매기의 발소리만 들릴 뿐, 작업실 안쪽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고 하더라. 사람 말소리는 들리질 않았지.


“현서는 거기 들어갔다가 늦게 나왔고?”


  금귤 아주머니는 흥미롭다는 듯 대꾸했지. 그러자 하숙집 아주머니가 우물쭈물 입을 뗐지.


  “아직 안 나왔어.”

  “뭐라고?”


  금귤 아주머니가 꽥 소리를 질렀지. 하지만 금귤 아주머니의 입은 웃고 있었어. 하숙집 아주머니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 말을 계속했어.


  “내가 오죽 답답했으면 너한테 먼저 전화를 했겠냐? 현서가 창고 들어가서 나오지도 않는다니까. 갈매기도 조각가도 나오질 않고. 정말 궁금해서 평소엔 하지도 않을 노크도 좀 해봤어. 아주 작게. 그런데 비바람 소리만 주야장천 들리지, 대꾸가 없어.”

  “손녀가 늦게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는데 이장님은 손녀 걱정도 않을까?”


  금귤 아주머니가 심드렁한 듯, 하지만 매우 신중하게 물었어. 목소리에 형태가 있었더라면, 아마 그때 그 목소리는 사냥감을 발견한 암사자를 닮았을 거야. 그러거나 말거나 하숙집 아주머니는 억울한 마음을 금귤 아주머니라도 알아주었으면 하고 말을 이었지.


  “안 그래도 창고 문 앞에 바짝 붙어서 말했어. ‘현서야, 날도 궂은데 늦게까지 거기 들어가 있으면 할아버지 걱정하신다’라고. 그랬더니 고 맹랑한 녀석이 자기가 따로 전화를 해두겠다는 거야. 자기는 거기서 조각가 아저씨랑 할 일이 남아 있대.”

  “할 일이란 게 무엇이길래?”

  “그걸 도통 말해주지 않아. 같이 온 친구들은 어떡하고 혼자 그렇게 날름 들어가냐고도 물어봤지. 그랬더니 걔들은 맘대로 자기를 따라온 거라고만 하더라. 그 말에 두 명은 입이 삐죽 나왔고 한 명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팔짱을 끼더라.”

  “아니, 어째 집주인이 되어서 문도 못 열고 들어가고, 참견도 못 한대! 형님도 참 답답하네.”


  금귤 아주머니는 이때다 싶어서 하숙집 아주머니를 자극하기 시작했어. 이번 일을 교훈 삼아 비상용 열쇠를 하나 마련해 두라는 이야기도 있었고, 기껏 차려 놓은 저녁상이 식지 않았느냐면서 핀잔을 좀 늘어놓으라고는 주장도 했지. 그리고 역시나, 조각상을 염탐해 보라는 제안도 빼놓질 않았어.


  “현서 고것은 보았을 거야. 조각상이 어디까지 만들어졌는지, 무엇을 조각상으로 했는지. 애한테는 보여주는 걸 정작 집주인 되는 형님한테는 싹 비밀로 한다는 게 영 괘씸하지 않아? 그래, 나야 맨날 가재 눈을 하고 저를 살피니 미울 수 있어. 그렇지만 형님한테 그러면 안 되지. 형님이 조각가 선생, 조각가 선생, 부르면서 얼마나 잘해줬는데.”


  평소 같았더라면 하숙집 아주머니는 평상 위에 놓인 금귤 하나를 입에 물고 침묵으로 일관했겠지. 하지만 이땐 달랐어. 금귤 아주머니가 들쑤시고 간 이후였잖아. 습도 높고 하늘도 어두운 날이어서 기분까지도 괜히 우울해지기 쉬운 날이었고. 어렵사리 끼니를 위해 재료를 손질하느라 잔뜩 굽었던 허리에, 불쑥 찾아온 동네 아이들이 옥신각신하는 목소리로 머리가 어지러웠던 날이었잖아. 금귤 아주머니가 낸 수수께끼 같은 잠입 계획에 혹해서 슬쩍 기회를 엿보기도 했지만, 아차 싶은 사이에 눈앞에서 창고 문이 쾅 닫혀버리니. 하숙집 아주머니도 어쩐지 금귤 아주머니의 말에 동조하기 쉬웠지.


  “매일 끼니 챙긴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긴 하지. 아니… 그래, 안 보여줘도 돼. 안 보여줘도 되지. 그렇지. 보여줄 의무는 없지. 하지만 눈앞에서 문을 쾅 닫을 건 없잖아.”


  금귤 아주머니가 무릎을 ‘탁’ 쳤지.


  “그래, 그렇다니까 형님. 언제 그냥 몰래 쓱 들어가서 보란 듯이 구경해. 내 집에서 이런 일을 하고 있구나, 시찰 나온 어른이 됐다고 생각해도 나쁘지 않다고 봐 난.”


  금귤 아주머니는 하숙집 아주머니의 말을 음악 삼아 리듬을 타듯 맞장구를 계속 쳤어. 하숙집 아주머니는 금귤 아주머니가 슬쩍 던져도 열매 속 씨앗처럼 퉤 뱉어버리던 말들을 머릿속으로 주워 담았지.


  ‘늦은 밤이 되었건 내일이 되었건 작업실 문이 저대로 계속 닫혀 있을 수만은 없지. 그렇다면 염탐 기회는 언제든지 있는 게 아닐까?’


  그때였어. 끼이익. 분명 창고 문이 열리는 소리였지. 누군가 밖으로 나오고 있었어.


  “잠깐, 문이 열린 거 같아.”


  하숙집 아주머니는 휴대폰을 귀에 바짝 붙인 채 목을 움츠리고 바깥 동태를 살폈지. 고개를 들어 창문을 통해 보니 조각가의 뒷모습이 보였어. 등에 잠든 현서를 업고서 장우산을 어깨에 걸친 채 걷고 있었지. 앉은자리에서 갈매기의 모습까진 보이진 않았지만, 으레 짐작으로 조각가의 품에 들려 있거나 발등 위에 올라타 있을 것 같았지.


  “현서를 집에 데려다주려는 모양이야.”


  하숙집 아주머니는 자기도 모르게 금귤 아주머니에게 상황을 중계하고 있었지. 금귤 아주머니가 다시 무릎을 탁하고 쳤어.


  “형님, 지금이네!”

  “어?”

  “지금 창고에 들어가서 그 잘난 조각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보자고!”


  한 번쯤 맘에 품었던 계획일지라도 갑작스레 그를 실현할 기회가 찾아오면 당황하기 마련이잖아. 하물며 어쩌다 혹한 하숙집 아주머니의 경우엔 더하지 않았을까? 아주머니의 가슴이 장대비처럼 크게 뛰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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