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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Oct 24. 2024

10화. 어두워지다

갈매기 마을 이야기

  조각가가 현서를 등에 업고 집을 나설 때만 하더라도 태풍이 조용히 지나가나 싶었지. 하지만 조각가의 등이 갈림길 너머로 사라져 보이질 않자 바람이 다시 요란스러워졌어. 하숙집 아주머니는 아직 통화 중이었지. 금귤 아주머니의 진두지휘에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어.


  앞에서 문을 쾅 닫았던 최근 기억은 좀 괘씸했지만, 그래도 자기가 선뜻 숙소로 내어준 공간에 몰래 들어가려니 망설여졌지. 철저한 준비 없이 행동에 옮기다가 꼬리가 밟히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들었어. 어쩌다 자기가 금귤 아주머니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는지도 어리둥절했지. 집처럼 지내다 가라면서 조각가의 손에 열쇠를 쥐여줬던 하숙 첫날이 떠올랐어.


  ‘첫인상이 안 좋진 않았지. 오히려 똑 부러지는 게 호감이었는데. 갈매기 데려온 건 예상 밖이었지만, 갈매기 문제로 나를 힘들게 한 적은 없잖아?’


  그랬다가 또 다른 생각에 잠겼지. 이번엔 깍쟁이 예술가 같던 조각가의 모습들이 떠올랐어. 작업에 관해 이런저런 질문을 갈매기 마을의 주민으로서, 한 지붕 아래 사는 사람으로서, 끼니 챙겨주는 어른으로서, 괜히 던질 때가 많았는데 어째 그때마다 조각가는 답변을 괜히 유보하곤 했지.


  ‘내가 뭐 자세하게 알려달란 건 아니었는데. 그냥 의례적인 답이었어도 좋았을 것을. 그랬더라면 별 생각 안 들고 금귤 얘가 하는 소리에 넘어가지도 않았을 거고.”


  조각가에 관한 평이 왔다 갔다 하는 사이 하숙집 아주머니는 금귤 아주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창고 앞으로 어기적어기적 걸어가고 있었어. 평소와 다르게 창고 문이 살짝 열려 있었어. 아무래도 현서를 등에 업고 우산을 쓰면서 갈매기까지 챙겨 나가려니 문을 잠글 손은 없었나 봐.


  “형님, 내 말 듣고 있어? 대답이 없네.”


  하숙집 아주머니는 조각가가 이 집에 온 이후로 창고 문이 이렇게 열려 있던 적이 있었는지 따져보았지. 식사는 주로 평상에서 함께 했지. 조각가 혼자 밥을 먹을 때엔 하숙집 아주머니가 개다리소반 한 상 가득 차려 평상 위에 두었고, “감사합니다.” 하면서 소반을 작업실 안으로 들고 문을 꼭 잠그고 먹었지. 방 청소도 혼자 알아서 하는 편이었기에 하숙집 아주머니가 창고에 청소하러 들어간 적은 없었지. 하숙 첫날, 방에 관해 이것저것 알려준답시고 문을 열었을 때만 빼면 문 너머의 공간은 두 달 가까이 되도록 하숙집 아주머니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공간이었어. 한때 작업실이라 부르던 곳이 미지의 영역이 되어 있었지. 그렇게 생각하자 호기심이 커졌어. 금귤 아주머니와 잠입 계획을 떠벌렸을 때만 하더라도 괘씸함과 서운함이 주된 감정이었는데, 지금은 정말 가벼운 마음, 호기심으로 문을 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지. 막상 기회가 찾아오니 그간 조각가와 지냈던 길지 않지만, 원만했던 나날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을까? 누가 뭐라 해도 하숙집 아주머니는 정이 많았거든.


  “아, 금귤아, 그래, 나 여기 아직 있어.”

  “들어간 거야?”

  “이래도 되나 싶은데. 궁금하긴 하네.”


  하숙집 아주머니는 발끝으로 살짝 문 아래쪽을 밀었어. 경첩 소리와 함께 문이 서서히 열렸지. 창고 안으로 아주머니가 슬쩍 발을 들여놓았어. 혹여 조각가가 돌아와 볼 새라 창고 불은 켜지 않은 상태로 어둠 속으로 한 걸음씩 걸어 들어갔지. 평소 저녁이었다면 그렇게 어둡지 않았을 텐데 그날은 태풍의 기운이 갈매기 마을을 덮쳤던 때라 창고 안이 참 어두웠어. 조각가가 악몽에서 깬 후 신경질적으로 닫아 둔 창문과 꼼꼼히 쳐둔 커튼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게 더 없었지. 어둠 속에서 밝은 눈으로 다니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좀 필요했어. 하지만 금귤 아주머니가 닦달을 시작했지. 문이 열리는 듯한 소리가 통화 음성으로 들렸던 거야.


  “형님, 그러지 말고 나도 보여줘!”

  “뭐라고?”

  “방금 문 열리는 소리 들리던데 들어간 거 아냐?”

  “안돼.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고.”


  하숙집 아주머니가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렸지. 아직 어둠에 적응하지 않은 눈 때문에 움직임이 조심스러웠어.


  “아니, 누가 직접 간다고 했나? 형님 핸드폰 영상 통화 좀 켜보란 말이야.”

  “영상 통화?”


  금귤 아주머니가 한숨을 푹 쉬더니 선심 쓴다는 듯 말했어.


  “화면을 톡 하고 건드려봐. 그러면 내 이름 나오고 그 아래에 버튼이 몇 개 뜰 건데, 그중 영상이라는 글자를 눌러. 그러면 나한테 알람이 오니까.”

  “불을 안 켜서 잘 안 보일 텐데. 이건가?”


  하숙집 아주머니는 금귤 아주머니가 말한 대로 했어. 버튼을 누르고 금귤 아주머니의 화면이 로딩 중이라는 안내 메시지가 떴지. 그때였어. 하숙집 아주머니가 창고에 들어서면서 창고 문이 꽤 많이 열려 있었거든? 그 문으로 바닷바람에 태풍의 입김이 뒤섞인 바람이 거칠게 불어왔지. 문이 쾅 소리를 내면서 아주 세게 닫혔어. 하숙집 아주머니는 범죄 현장을 밝힌 사람처럼 “엄마야!” 하고 소리를 지르면 핸드폰을 손에서 놓아버렸어. 천장 쪽으로 던져 버렸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놀라서 두 손을 번쩍 들 때 손에서 미끄러져 나갔거든. 아무래도 조각가 몰래 방에 들어왔다는 생각에 심장이 쪼그라들어 있었나 봐.


  뒤이어 번개와 천둥이 치자 하숙집 아주머니는 핸드폰을 내동댕이치고서 캄캄한 창고 안의 형체 모를 물체를 꽉 붙들었지. 양손 가득 힘껏 주먹을 쥐고서 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잠시 몸을 수그리고 있었어. 눈까지 감고서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지.


  “형님, 괜찮아?”


  금귤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렸어. 하숙집 아주머니가 정신을 차리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어. 간신히 두 눈을 다시 떴을 때, 어둠 속에서 환히 빛나는 핸드폰을 가장 먼저 찾았지.


  “아, 어, 이젠 괜찮아. 바람이 갑자기 세게 불어서 문이 쾅 닫히는데.”

  “괜찮거든 이제 화면 좀 돌려봐. 형님 얼굴 보여주지 말고. 화면 한 번 더 누르고 전환 버튼 누르면 후방 카메라 쪽을 비출 거야. 그러면 나도 조각가 양반이 창고 안에 뭘 어떻게 해놓고 사는지 볼 수 있어.”


  이전과 다르게 하숙집 아주머니의 눈에 주변 지형지물도 좀 더 잘 들어왔어. 그새 어둠에 적응했나 봐.


  “보채지 좀 말아봐.”


  순간 하숙집 아주머니는 침을 꼴깍 삼켰어. 어둠에 적응한 눈에 들어오는 풍경, 핸드폰이 뿜어내는 빛의 반사 작용으로 더 환히 보이는 주변 풍경에 입이 떡 벌어졌거든. 방금까지 하숙집 아주머니가 번개와 천둥을 견디느라 두 손으로 꽉 붙잡고 있던 거 있지. 그건 바로 조각상의 반죽이었어. 제대로 굳기 직전의 조각상, 일종의 찰흙 상태 같은 조각상이었지. 갈매기의 날개를 닮은 부분이 움푹 패 있었어. 정확히 말하자면 비틀려 있었지. 하숙집 아주머니가 천둥소리를 견디느라 움켜쥐었던 형체 모를 물건이 바로 조각상이었던 거야. 잠깐 들어와서 슬쩍 보고 가려던 것뿐이었는데 사고를 치고 말다니. 그 와중에 금귤 아주머니는 어서 카메라를 돌리라며 하숙집 아주머니를 보채고 있었고. 그러거나 말거나 하숙집 아주머니는 눈앞의 광경에 섣불리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한 발자국 떼는 것도 조심스러워졌지. 그래도 판단 하나는 확실히 내렸어.


  ‘이걸 금귤에게 보여줬다간 무슨 소문이 날지 모른다!’


  하숙집 아주머니는 실수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는 듯 연기를 했지. 우악스럽게 핸드폰을 껐어. 그리고 혼자 우두커니, 어둡고 고요한 창고 한가운데 서 있었어. 괜한 욕심과 참견에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는 죄책감이 밀려왔지. 어떤 변명을 할지, 애초에 변명을 할 수 있는 처지 이긴 한지 난감했어. 그런데 조각상 반죽 아래쪽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렸어.


  “꾸르?”

  “엄마야!”


  조각가와 함께 집을 나선 줄로만 알았던 갈매기가 작업 테이블 밑에서 하숙집 아주머니를 올려다보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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