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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Nov 02. 2020

65. 어떤 노란색을 쓰시겠어요, 고흐 씨?

ESSEC 비즈니스 스쿨 봄 계절학기 노트(3)

17.04.04 화요일


세르지는 시골이다. 밖으로 나도는 습관이 있는 내게는 꽤나 답답한 환경이다. 때문에 제아무리 재미난 수업을 듣고 있다 하더라도 세르지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들었다(수업 내내 엉덩이가 가벼웠다). 오후 네시, 수업이 땡 하고 마치자마자 파리행 RER에 올라탔다. 뭐라도 좋으니 먹고 걷고 싶었다(여긴 파리니까!).


세르지의 풍경은 평화롭고도 평화롭다. 햇살이 들어선 AirBnB 무리엘 할머니 댁(좌)과 럭셔리 상품, 향수 패키징 수업이 한창이던 ESSEC의 어느 강의실 풍경(우)



하지만 파리 시내에 도착했다는 설렘도 잠시, 마레지구를 걷는 내내 마주치는 한국인들이 너무나 많다 보니 지금 내가 걷는 곳이 마레지구인지 가로수길인지 혼동이 왔다. 오랜만에 거리에서 듣는 한국어가 반가워 말을 걸고도 싶었지만, 오지랖 부리는 현지인처럼 보일까 봐 괜히 얌전해졌다. 정처 없이 걷다가 Rouger&Plé란 이름의 대형 화방을 구경하게 되었다. 20년대의 파리에 관한 환상을 갖은 콘텐츠를 통해 접한 나로서 파리의 화방은 왠지 모르게 한 번쯤 방문해 보고 싶은 곳이었다(낭만의 집결지라고 할까?). 과연 홍대 앞 어느 화방들과 무엇이 다르고 같을지를 기대하면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특이한 점은 이젤과 캔버스의 종류가 상당히 다양했다는 것과 다소 빈티지스러운 디자인의 물감과 팔레트 세트가 곳곳에 진열되어 있었다는 거다. 비록 프랜차이즈화 된 파리의 화방들이지만 20년대 그때 그 시절의 감성을 간직하고 싶었던 걸까?


언젠가 심야 라디오 방송에서 '반 고흐가 쓰는 노란색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면서, 고흐의 다채로운 노란색을 상품화한 반 고흐 물감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혹시 이곳에서 반 고흐 물감을 살 수 있을까, 하고서 한참 물감 코너를 구경하다 보니 노란 튜브 물감 몇 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노란색의 다채로움이 전부는 아니여도 조금은 담겨 있었다. 꽃정원을 즐겨 그리는 동생 필제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해주고 싶 마음에 고흐의 물감 중 가장 맘에 드는 노란색을 골라 계산대로 들고 갔다(나중에 선물하고 보니, 내가 고른 이 노란색은 국내에 들어와 있는 반 고흐 물감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노란색이라는 걸 전해 들었다. 괜히 더 뿌듯해졌다). 필제가 이 물감으로 그려나갈 꽃잎 한 장 한 장이 기대가 된다.


"노란색도 다시 보자"


화방 구경을 마치고서 숙소로 들어가기 전 허기진 배를 조금 달래고 싶었다. 지난겨울 계절학기 때 방문했던 Ofr 서점 쪽으로 걸으며 먹거리를 찾아다녔고, 우연히 근처에서 Pinson이란 이름의 카페를 찾았다. 하얀 화살표 간판이 깔끔하고 조용해 보이는 내부가 궁금증이 일게 했다. 그리고 나는 카페 문을 힘차게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파리에서 어떻게서든 (이제 막 배운) 불어를 사용해 보려는 '아가 불어 구사자'인 나로서는 이 도시에서의 한 걸음 한 걸음이 너무나 새롭고 설렌다. Pinson 카페에서 음식을 주문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특이하게도 유기농 재료로 만든 채식 메뉴들이 많았는데, 'manger(먹다/식사하다)' 하러 왔는지 'goûter(간식 먹다)' 하러 왔는지를 묻는 종업원의 질문에 goûter라고 대답하고선 샐러드 메뉴인 croustilllant de sarrasin을 주문할 수 있었다. 꽤나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지만 혼밥과 혼불()를 성공적으로 마친 것을 자축하자는 의미에서 맛있어 보이는 커피도 한 잔 시켰다. 이제야 조금씩 아가 불어가 빛을 발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신이 났다!


나를 유혹하던 카페 Pinson의 귀여운 화살표 간판(좌)과 용기 내어 불어로 주문과 계산까지 마쳤던 샐러드 메뉴(우)! 건강하면서 맛까지 챙길 수 있다니, 정말 훌륭한 샐러드!







To. Readers

우리에게(uns, [운스]): 파리만 여러 번 방문한 나는 재미있게도 그때마다 다른 수준의 불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불어는커녕 전공인 독일어도 이제 막 배우기 시작했을 때, 영어만을 고집하면서 파리를 누빌 때, abc를 간신히 익히고 이제 막 숫자 읽기를 배우고 있을 때, A1 수업을 다 마쳤을 때, A2 수업을 듣고 있을 때, B1 시험을 준비할 때... 거리와 상점 주인들의 언어를 이해하는 정도가 달라짐에 따라, 파리를 누빌 때의 재미 또한 매번 달라졌다(좋은 방향으로!). 간판 읽는 재미, 옆 테이블의 생활 불어를 해독하는 재미, 서점에서 동화책 하나라도 골라서 볼 수 있는 재미, 메뉴판을 탐독하는 재미, 숙소 주인과 수다를 떠는 재미 등... 언어를 배우면 확실히 새로운 세상이 보인다는 걸 파리를 통해 배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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