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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정저장소 Dec 15. 2020

15. 택시 안에서의 시 낭독[배움]

배움의 자세

“아니 소리 내서 읽어봐”


택시를 탔는데 기사님이 시를 낭독하라고 하셨다.

지금 생각해도 진짜 황당해서 웃음밖에 안 나온다.
지금 같으면 정중히 거절했을 텐데, 그 당시에 순진한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그걸 또 낭독을 했다. 달리는 택시 안에서.

그때 상황은 이랬다.
택시를 타고 내가 XX고등학교로 가달라고 하니까, 갑자기 기사님이 요즘 시를 쓰고 있다며 한번 읽어보라고 다짜고짜 나에게 말하셨다. 신호가 빨간 불로 바뀌자, 핸드폰에 자신이 쓴 시를 찍은 사진을 내게 보여주고 읽어보라 한 것이었다. 그래서 보고 있는데 소리 내서 읽으라고 말씀하신 상황이었다.

난 아무 생각 없이 읽었다. 그랬더니 갑자기 시가 어떠냐고 물어보셨다. 좋다고 대답했더니 구체적으로 어떤지 말해달라고 하셨다.


‘아.. 잘못 걸렸다..’


딱 봐도 기사님은 자신의 시가 좋다는 것을 남에게 구체적으로 듣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나에게 본인의 문학 실력을 자랑하려는 듯했다.

근데 나는 오만가지의 문학작품들을 분석하고 문제집으로 풀고 기계처럼 공부하는 대한민국의 수험생이었다. 더군다나 문과생이라 밥 먹고 국어공부만 했다. 그래서 기사님이 나에게 더 자랑하기 전에 어서 빨리 이 자랑을 제지하고 싶었다. 나는 거의 심화 문제를 푼다 싶을 정도로 시를 분석해서 고급 어휘를 써가며 말을 시작했다.

“아, 이 부분은 수미상관 법을 쓰셨으면 좋았을 텐데 대구법은 이런 부분보다는, 여기에다가 모음조화가 이루어졌으면..’ 소리 없는 아우성’ 아시죠? 그런 역설적인 표현이 들어가면 좋겠...”

지금은 까먹어서 기억이 안 나지만, 그 당시에 진짜 어려운 말들만 골라서 했던 거로 기억한다.
(나도 참 나빴다.. ㅋ)

내 예상대로라면 기사님이 조용해지셔야 했다. 그런데 상황은 정 반대였다. 기사님은 흥분하시더니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렇지 그렇지 나도 그런 것 같더라. 아 그러니? 또 다른 부분도 한번 봐줄래? 이 부분은 어때? 여기서 고칠만한 거 있니?”


그렇게 자랑하며 나를 가르치려고 하신 모습은 사라지고 이제는 나의 말을 듣고 나에게 더 조언을 듣기 위해 다른 시를 보여주면서 피드백을 더 해달라고 하셨다.

기사님은 내가 하는 말을 따라 하면서 기억하려고 하셨다. 자세를 낮추고 한참은 어린 나에게 배우셨다.

분명 나 같으면 손자뻘 아이에게 자랑을 하다가 상황이 뒤바뀐다면 자존심 상해서 그냥 조용히 있었을 텐데 기사님은 다르셨다. 배움에 있어서 나이는 전혀 중요해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아는 문학 지식들을 총동원해 구체적인 피드백을 해드렸다. 기사님은 학교에 도착했는데도 나보고 좀만 더 얘기하고 가면 안 되겠냐며 나를 설득하기까지 했다. 아쉽게도 진짜 지각이어서 안 되겠다고 하고 얼른 내려서 학교에 갔다.

뜬금없이 자신의 시를 낭독해 보라며 자랑하는 것은 조금 그랬지만,
자존심과 자랑을 내려놓고 손자뻘 학생에게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배우려고 하는 모습이 멋있었다.

배움에는 끝이 없었고, 나이도 중요하지 않았다.
모두가 살아온 환경이 다르기에 누구에게나 배울 점은 존재한다. 배울 점이 있다면, 기꺼이 자세를 낮추고 배우자. 그게 누가 됐든. 그 배움이 나를 한층 더 성장하게 만들어줄 테니까.

근데 반전인 것은,
그때 국어 모의고사 5등급이었다..(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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