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을 보며 거리를 걷다, 저만치 멀리서 한 여성이 걸어오는 것을 흰 눈자위 너머로 인식한다. 아무렇지 않은 척,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여자를 흘긋 본다.
"예쁘다...!"
하지만 이렇게 낯선 길에서 마주친 이 여자와 인연을 이을 방법은 아무것도 없음을 안다. 아니, 만들 수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그녀는 나와 인연을 맺지 못한 채, 그녀의 이미지조차 내 기억과 어떤 접점도 찾지 못하고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모든 낯선 마주침은 슬프다.
언젠가 내가 길 위에서 이상형을 보았을 때 느꼈던 찰나의 감정을 굳이 글로 쓰면 이와 같이 나타낼 수 있지 싶다. 그런데 이런 사소한 일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 아이러니 등을 들여다보며 소설로 써낸 작가가 있었다.
<체호프 단편선>
안톤 체호프라는 이름은 정말 최근에야 알게 됐다. 연초에 읽고 싶은 책이 있어 이를 주문하려다, 배송비 때문에 하나 더 고른 책이 <체호프 단편선>이었다. 고른 기준도 참 단순했다. 싸고, 얇고, 읽기 편한. 그런 점에서 이름도 알지 못하는 작가였지만 그 뒤를 받침 하는 <단편선>이라는 단어와, 적당히 알맞은 가격으로 이 책 역시 함께 장바구니에 넣었다. 그렇게 한동안(5개월 정도 흘렀더라) 이 책은 책장을 벗어날 기미도 없었다.
반 년 가까이 되어 이 책을 집어 든 이유도 별 게 없었다. 너무 읽고 싶은 책이 많은데, 무엇부터 읽어야 좋을지 모르던 혼란이 오히려 다른 책을 읽어야겠다는 아이러니(?)한 결심을 낳게 했다. 그러다 발견한 게 얇고 빠르게 읽기 좋은 이 책이었다.
소감을 말하면, 너무 오랜만에 소설을 읽었던 탓인 데다 작가가 주제의식을 드러내기보다 인물의 감정선에 초점을 맞추는 글을 써서인지 작가가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잘와 닿지 않았다. 그럼에도 서두에서 얘기했듯, 인물의 감정이나 찰나의 생각을 풀어놓은 글이 참 매력적이었다. 가장 처음 등장하는 <관리의 죽음>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체호프의 대표작이었더라. 그럴 만 했다.
어떤 관리가 상관에게 작게 실수를 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인공은 거듭 사과를 반복한다. 젠틀한 상관은 처음에는 괜찮다며 너털웃음을 짓다, 계속된 사과에 당황한다. 며칠을 따라다니며 머리를 조아리는 관리는 이내 상관의 화를 돋우고, 끝내 역정을 내며 분노하는 상관의 모습을 보며 관리는 앓아누워 죽는다.
... 이게 뭐지?
그런데 서평을 쓰면서 다시 보니 행간에서 사람 사이의 미묘한 감정선이 읽힌다. "나라면 어땠을까?"하며 상관에 스스로를 넣어 보고, 관리라면 어떠할지도 생각해본다. 그게 핵심이었다. 소설에서 보통 기대할 수 있는 주제의식에 집중하기보다 그 순간에서 인물들이 느끼는 감정에 나를 대입하고, 여러 인물과 나를 치환하면서 인간의 감정을 일종의 시각화한다는 점이 이 책의 묘미였다.
"그것은 소녀의 아름다움에 대한 질투 때문인지, 아니면 이 소녀가 지금 내 것이 아니며 앞으로도 영영 내 것이 될 수 없는 타인이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소녀의 흔치 않은 아름다움이 지상의 다른 모든 존재들처럼 우연하고 불필요하고 무상한 것이라는 사실을 내가 막연히 느끼고 있었기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나의 슬픔은 진정한 아름다움을 관조할 때 인간의 마음속에서 불러일으켜지는 특별한 감정이었는지도 모른다. <미녀>, p.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