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법 개정안이 발표된 날.
아침부터 어김없이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이사와 입주 준비로 정신없이 메일을 정리하던 손을 잠시 멈추고,
커피를 한 모금 머금은 채 뉴스를 넘기던 순간,
한 문장이 불현듯 나를 붙잡았다.
"영국 정부, 새 'Earned Settlement' 제안 발표..
대부분 이민자의 영주권 요건 5년에서 10년으로 확대 검토."
문장을 읽는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영국에 온 뒤 나는 종종 이민을 '관계'에 비유하곤 한다.
유학은 연애였고, 이민은 결혼이었다고.
하지만 그전에 한 가지를 분명히 하고 싶다.
그렇다고 유학이 결코 쉬웠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오랜 기간 유학을 한 경험이 없기에,
유학생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비용, 피땀을 들여 결과를 만들어내고
타국에서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가는지 감히 헤어릴 수 없다.
그 여정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내가 '유학은 연애였다'라고 표현한 이유는
관계의 구조와 제도적 무게가 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민은 결혼이었다.
감정만으로 유지되지 않고, 제도와 법이라는 '상대의 조건'이 조금만 바뀌어도 우리의 일상이 함께 흔들리는 관계.
이번 개정안에서 나를 가장 얼어붙게 만든 문장은 단 하나였다.
영주권 요건: 5년 ->10년.
표면상 단순한 숫자 변경처럼 보이지만, 그 숫자가 내 숨을 길게 끌고 갔다.
한국에 있는 지인들은 말한다.
"5년 더 기다리면 되는 거 아냐? 시간 금방 가~ "
하지만 이민자의 삶에서 5년은 단순한 세월이 아니다.
그건 계획이고, 구조이고, 우리가 버티기 위해 세워놓은 미래의 기둥이다.
우리 역시 5년을 기준으로 삶을 조심스레 설계해 왔다.
감사히도 남편의 회사는 한 번에 5년짜리 스폰서 비자를 제공해 줬다.
5년 동안 비자 연장 없이 지내다가 바로 영주권을 신청하라는 회사 측의 배려가 보였다.
하지만 그 5년이 10년으로 늘어난다면?
그건 단순히 시간이 길어지는 문제가 아니라,
처음부터 다시 설계해야 하는 삶을 뜻했다.
가장 큰 문제는,
요즘같이 경기가 어려운데 회사에서 다시 스폰서십 비자를 지원해줄까?
추가 비용과 절차를 감수해 줄까?
혹은 비자가 필요 없는 인력으로 남편의 책상을 조용히 대체하려 하지는 않을까?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진 않았지만, 그 두려움은 마음 깊은 곳을 날카롭게 찔렀다.
게다가 올해 우리는 집까지 샀다.
월세에서 벗어나 드디어 대출을 갚아가며 조금씩 자리를 잡을 거라 믿었다.
새 집의 냄새, 우리가 함께 고른 소파, 벽에 걸릴 그림들.
그 모든 것이 '정착'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현실처럼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런데 단 한 줄의 법 개정 소식이 그 꿈을 다시 흔들었다.
"이 안정이 하루아침에 무너진다면?"
그 조용한 질문 하나가 이민자의 일상에 잔잔하지만 깊은 파동을 남겼다.
외국인으로 산다는 건 이런 작은 진동들을 안고 살아가는 일이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어떤 버튼은 내가 아닌 '제도'가 눌러버린다.
물론 이번 개정안은 아직 확정되지도 않았고,
연봉/거주유형/비자조건/ 등 기준도 매우 복잡하다.
하지만 이성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불안이다.
최근, 친한 지인이 사소한 서류 실수 하나로 영주권이 거절되어 급히 한국으로 돌아간 일을 떠올리면
'내일은 우리 차례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조용히 고개를 든다.
어느새 우리는 계산기를 꺼내 들었다.
연봉, 체류 일수, 비자 조건...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맞춰보며.
''우리는 여기서 살아도 된다는 증거를 또 어디서 찾아야 할까?"
그 질문은 해마다, 때로는 분기마다 찾아왔다.
살아가기 위한 노력보다, 살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기 위한 노력처럼 느껴질 때면
마음이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나이가 들면서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의 간격이 얼마나 먼지 깨닫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했다.
하고 싶은 마음 하나로 버티던 20대와 달리, 30대 중반이 되자 삶은 더 정직한 얼굴을 내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즈음, 나는 또 하나를 배웠다.
세상은 절대 내가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
내가 그린 계획의 50%라도 이루어진다면 이미 큰 행운이라는 것.
예전엔 그저 누군가의 조언으로 들렸던 말이
이민자의 삶을 살고 있는 지금은
현실이 되어 마음속으로 깊이 스며든다.
삶은 내가 끌고 간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흐르는 물살 위에 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착을 꿈꾸며 버티는 동안에도,
제도와 정책이라는 물살은 늘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우리를 밀어붙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된다.
어떤 흔들림은 결국 우리에게 닿아야 할 자리로 이끄는 조용한 전조였다는 것을.
그 믿음을 가슴 한쪽에 지닌 채,
나는 오늘도 묵묵히 내 하루를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