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스퍼드 Gallery JIB의 Mingle in winter.
요즘 나는 영국에서 이사 준비를 하며 정신없이 지내고 있다.
그 와중에 한국 가족에서 들려오는 좋지 않은 뉴스들은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럴수록 뭔가 나를 차분하게 해주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껴, 어느 날 런던의 미술관들을 천천히 서성거리며 마음을 비워보려 했다.
그러던 중, 지인의 추천으로 옥스퍼드의 Gallery JIb에서 열리는 전시 <Mingle in Winter: First Original>를 다녀왔다.
요즘 한국에서 각광받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이 이 먼 영국까지 건너와 전시 중이라는 이야기에 마음이 설렜다.
우리 집에서 멀지도 않았고, 영국에서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볼 소중한 기회는 흔치 않으니 '이건 꼭 가야 돼'라는 생각이 들어 얼른 관람예약 버튼을 눌렀다.
그날의 관람은 예상보다 훨씬 깊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특히 갤러리 관장 고현수 대표님의 진심 어린 큐레이팅은 그저 몇 문장을 던져주는 설명이 아니라,
예술을 처음 접하는 사람도 작품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도록 이끄는 안내서 같았다.
기계음의 로봇 한국어도, 건조한 해설도 아니었다.
작가의 의도,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 느끼는 방식까지.
덕분에 나는 작품을 '보는 것'을 넘어 '경험하는 것'으로 온전히 누릴 수 있었다.
그 감동을 독자 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 이렇게 글로 전하려 한다.
옥스퍼드의 조용한 골목을 따라 걷다 보니, 네이비색 현관문이 조용히 나를 맞이했다.
도톰한 겨울 공기를 머금은 색감이 유난히 깊어 보였고, 그 순간 이곳이 평범한 집은 아니라는 걸 본능처럼 느꼈다.
초인종을 누르고 몇 초 뒤, 문이 열리자 분위기는 부드러워졌다.
따뜻한 겨울 햇빛 아래에서 고현수 관장님이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그녀의 말투와 눈빛은 맑고 차분하지만, 그 속에는 예술에 대한 깊은 애정이 은은히 스며 있었다.
거실로 향하는 짧은 복도에는 한국 작가의 회화 작품이 한 점 걸려 있었다.
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을 때,
왜 사람들이 '집'에서 예술을 마주하는 경험을 특별하게 여기는지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거실로 들어서자 넓은 통유리 사이로 겨울 햇빛이 작품 위에 고요하게 내려앉았다.
관장님 가족이 실제 생활하는 1층 공간을 전시를 위해 다시 구성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의 세심함이 공간 곳곳에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고,
나는 그 온기 속에서 작품과 공간이 서로를 완성해 주는 순간을 느꼈다.
관장님은 이 집을 갤러리로 선택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작품은 꼭 새하얀 갤러리에서만 빛나기보다는
평범한 가구와 아이들의 생활 흔적이 남아 있는 집에서도 좋은 작품은 공기를 바꾸고,
사람에게는 온기를 주는 힘이 있다고 믿어요."
집과 닮은 공간에서 작품을 마주하면 오히려 더 깊이 스며든다는 믿음.
작품 하나가 가족에게 오래도록 이야기를 시작하게 하고,
때로는 하루를 버텨내게 해주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
그 믿음을 실제로 보여주기 위해 이 겨울, 이 공간에서 전시를 시작했다고 했다.
그 말이 유난히 마음에 오래 남았다.
이 아늑한 공간에서 내가 가장 먼저 시선을 빼앗긴 작품은
한국의 떠오르는 작가 장수지 작가의 '소,녀 / 소, 년' 작품이었다.
처음 장수지 작가의 그림 앞에 섰을 때, 특유의 그림 풍과 색채에 나도 모르게 작품으로 빠져들어갔다.
흔히들 신비롭다고 생각하는 보라색과 파스텔 파랑 그리고 눈부신 살구색 등.
신비로우면서도 우주의 공간을 옮겨 놓은 듯한 빛을 머금은 눈.
마치 "나는 너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어"라고 조용히 속삭이는 듯한 시선 같았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각 작품이 신비로우면서도 강렬한 눈을 통해, 우리가 말로 꺼내지 못한 불안과 두려움을 대신 바라보고, 공감해 주고 이해해 주고 싶었다고 한다.
그녀의 작품 곳곳에는 몇 가지 독특한 특징이 있다.
1) 작품 속 인물에게 그려진 '주근깨'
작가는 주근깨를 사랑스러움의 상징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어쩌면 '모든 사람은 결국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메시지를 은근하게 건네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2)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신비한 분위기의 꽃
장수지 작가의 작품 속 배경에는 현실에는 없는 신비로운 꽃이 피어난다.
그 꽃들은 작가가 꿈속에서 찾은 이상을 상징하며,
그 안에서 스스로 안정감을 얻듯 관람자에게도 은근한 위로를 건넨다.
3) 빠진 엄지손가락
그녀의 인물들은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모으고 있지만 자세히 보면 엄지손가락이 없다.
그건 무엇인가를(꿈, 이상, 집념) 악착같이 꼭 움켜쥐거나 절박하게 붙잡는 모습이 아니라,
더 평온하고 은은한 방식의 '꿈'과 '이상'을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두려움을 밀어내고,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앞으로 나아가려는 마음.
그 은근한 열망이 작품에 잔잔한 안정감을 준다.
4) 선명하고 신비로운 눈
작가가 가장 공들여 표현하는 것 중 하나는 '눈'이다.
그 눈동자는 단순한 감정 묘사가 아니라, 위로의 통로로 생각한다.
관람자의 마음을 읽어주는 '창'같은 역할을 하며, 불안, 두려움, 외로움을 위로하고, 함께 바라보는 장치다.
5) 앙다문 입, 굳어진 표정
작품 속 인물들은 입술을 꼭 다문 채 무표정이다.
작가에 따르면 이는 사람이 긴장하거나 불안할 때 드러나는 가장 솔직한 표정이라고 한다.
삶의 작은 무게들이 입술 끝에서 굳어버린 것처럼.
<소, 녀 / 소, 년> 시리즈는 이런 꿈속의 감정을 시각적으로 번역한 작품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소녀가 의지하며 편히 기대고 있는 사슴은(작품- Oh, deer),
두려움 속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고 평온을 찾는 마음의 풍경과도 같다.
작품 속 소녀가 동물이나 꽃들로 쌓여 불안과 두려움이 치유되는 순간들을 포착한다.
마지막으로,
장수지 작가의 작품들을 보면서 내가 느끼는 두려움, 불안들 그 불편한 감정들은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구나.
모두 가슴속의 각자의 불안과 고민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양한 곳에서 각자의 치유 과정을 통해 극복해 나가고 서로에게 위로를 건네며 이겨내며 살아가는 것.
추운 겨울이 다가오는 어느 날, 갤러리 '집'에서 장수지 작가의 위로와 손길을 느끼며 얼어붙은 마음이 녹아들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달 항아리 그림을 좋아한다.
이상하게도 달 항아리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 한편이 고요해지고, 묘하게 좋은 기운이 스며드는 듯한 느낌이 든다.
갤러리 관장님께서 달 항아리에 담긴 의미를 설명해 주셨는데,
그 이야기가 유난히 오래 마음에 남았다.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달 항아리에 돈과 쌀, 소금 같은 귀한 것을 보관했다고 한다.
귀한 것을 품은 만큼 매일 쓰다듬고 보듬듯이 아끼고 지냈고, 그래서 달 항아리에는 완벽한 대칭이 아니더라도
생활의 흔적, 자연스레 일그러진 모습이 그대로 남았다고 한다.
어쩌면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그 형태를 사랑했을까,
깨지지 않는 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유일한 아름다움이자 가치였다고 믿었을까.
'아, 그래서 나는 달 항아리를 보기만 해도 좋았구나.'
그들의 정서와 마음이 오랜 시간 DNA처럼 이어져 내려와, 지금의 우리에게도 달 항아리가 '귀하고 어여쁜 존재'로 느껴지는 것이었구나.
양성훈 작가 역시 흠 하나 없는 매끈한 달 항아리보다 손때가 오르고 세월의 결이 담긴 달 항아리를 작품에 담아낸다고 한다.
옥에 티처럼 보이는 크고 작은 결점도, 완전하지 않는 모양도, 그 자체로 아름다움이 되고 귀함이 된다고.
그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우리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 또한 결점이 하나, 둘 있더라도 그 존재만으로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
달 항아리의 우아한 기품을 바라보며, 결핍과 불완전함조차 품어내는 그 넉넉함을 또 한 번 깊게 느끼고 왔다.
임현희 작가는 '칠을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저 색을 흘러가듯 올리고, 그 흐름이 남긴 흔적을 작품 속에 그대로 담아낸다.
우리가 겨울 창가에 남기는 숨결을 떠올리면, 유리 위에 얇게 스미고 이내 사라져 버리는, 존재했는지조차
가물가물한 흔적이 된다. 작가는 그 미세한 숨의 흔적에 질문을 건넨다.
"네가 여기 왔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그 질문을 품고 탄생한 '숨 한 조각'은, 보이지 않는 존재와 순간의 흔적을 '빛'으로 남기고자 한 시도였다.
작품을 멀리서 바라보면 깊고 잔잔한 바다처럼 보인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 넓은 수면 위에서 거대한 파도가 땅을 쓸어내는 듯한 생동감을 품고 있다.
이 대비되는 느낌은 결국 이런 메시지를 전하는 듯하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 쉽게 사라지는 것들조차 다른 의미를 품고 존재하고 있다는 것.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사실은 전혀 다른 모습과 깊이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임현희작가는 그 보이지 않는 존재의 무게를, 작품 속 흐르는 색과 빛의 흔적으로 조용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한국 팝아트를 이끄는 권수연 작가.
함께 전시를 찾은 지인이 가장 가장 소장하고 싶다며 눈을 반짝였던 작품도 그의 것이었다.
작품 앞에 서는 순간, 마음 깊숙이 숨어 있던 동심이 스르르 깨어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괜스레 미소가 번지고, 몸 안 어딘가에서 작은 기분 좋음이 피어올랐다.
왼쪽 미키마우스 코끼리 작품 제목은 '하늘에서 복이 내려와요.'
그림 속에서는 온 세상에서 떨어지는 복을 행복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미키마우스 코끼리가 등장한다.
겉으로 보면 단순한 팝 일러스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어마어마한 공력과 노고가 담겨 있다고 한다.
'완벽주의'를 지향하는 권수연 작가는 작은 선 하나도 수차례 반복하여 그려낸다.
그래서일까. 컴퓨터 그래픽처럼 보일 만큼 정교한 선과 색감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에 가까운 캐릭터와 화면 구성은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오른쪽 작품인 '선물이 도착했습니다.'에서는 분홍빛의 귀여운 아기 코끼리가 등장한다.
어디선가 본 듯한, 브릭베어를 닮은 모습 덕분에 묘한 친밀감이 느껴졌다.
왠지 선물을 기다리는 작은 꼬마 숙녀의 얼굴 같아 보여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함께 전시를 본 지인은
왼쪽 작품 '하늘에서 복이 내려와요'는 아들 방에,
오른쪽 작품 '선물이 도착했습니다'는 딸 방에 나란히 걸어두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이 괜히 따뜻하게 느껴졌다.
두 작품이 전해주는 밝은 에너지와 설렘이, 어느 방이든 작은 행복을 가득 채워줄 것만 같아서.
걸음을 옮겨 거실에서 왼쪽으로 몸을 살짝 틀면, 고즈넉하고 아늑한 방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그 안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조용하지만 시릴 만큼 아름다운 작품들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한 발짝 더 다가가자, 아기자기한 동양의 찻잔과 차환 그리고 다관이 중간에 자리를 잡고 반겨주었다.
영국에 이주한 뒤로는 'English Teapot'이나 'Tea set'이 자연스럽게 눈에 익었는데, 이번 전시에는 한국적 색채의 찻잔과 다관이 놓여 있어 오히려 더욱 반갑고 신선하게 다가왔다. 한국에서조차 마주치기 쉽지 않은 전통 찻잔을 타국에서 만난다는 사실은, 영롱함을 넘어 마음 한쪽을 찌르듯 아릿한 감정을 남겼다.
고현수 관장님께서는 한국 도예 문화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덕목이 '절제'와 '겸손'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그래서인지 작품들에는 과한 장식이나 과시적인 곡선이 아닌, 차분하고 절도 있는 명장의 손길, 깊이 응축된 예술성이 고스란히 베어 있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겉보기와 달리 찻잔과 다관의 섬세한 기능성이다.
아기자기한 외형 속에는 마시는 사람의 입술 모양과 차의 흐름까지 고려한 치밀한 계산이 숨어 있었다.
입술에 닿는 촉감을 물론, 차가 흐르지 않고 단정하게 잔으로 떨어지도록 다관의 주둥이 각도까지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이렇듯 보이지 않는 곳까지 깃든 작가의 정성과 혼, 그리고 아름다움을 향한 세심한 배려가 작품 곳곳에서 느껴졌다.
오래 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선조들의 미의식과 정신이 내 마음까지 조용히 어루만지며 차분함과 안정감을 선사하는 순간이었다.
원래 무대의 마지막은 클라이맥스가 장식하는 법.
모든 작품 하나하나가 아름다웠지만 그중 내게 가장 큰 울림과 충격을 주었던 작품은
우종택작가의 '산수화'였다.
경기도 광주 대지산에서 창작하는 우종택 작가는 자연을 '그리는' 화가가 아니라, 자연과 함께 존재하며 자연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작가이다.
그는 매년 겨울, 텐트를 짊어지고 한 달 동안 산속에 머물며 자연과 호흡하는 시간을 갖는데,
이를 ‘접기(接氣)’, 즉 자연의 기운을 몸에 받아들이는 행위라고 설명한다.
그의 산수화는 시각적 풍경을 묘사하는 것보다는 오감으로 느낀 자연의 본질이 캔버스 위에 스며든 결과에 가깝다.
그래서 그는 그림을 계획하지 않고, 그저 자연이 스며들기를 ''기다린다.'' 작품은 완성된 뒤에야 비로소 그에게 말을 건넨다고 한다.
우종택 작가는 전통 기법에 머무르지 않고, 숯가루, 백토, 감자전분, 송진등을 먹에 섞어 자신만의 '용묵법'을 개발했고, 여기에 젯소(gesso)를 더해 질감과 깊이를 확장한다. 이러한 물질적 흔적은 캔버스 위에서 기운의 흐름처럼 솟구치고 번진다. 그리고 그는 납작붓 대신 둥근 붓을 고집하며, 봉(鋒)에 기운을 모아 내는 동양적 선의 정신을 따른다고 한다.
무엇보다 우종택 작가가 자연을 대하는 태도는 특별하다. 자연을 묘사하거나 상징화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이 이미 완성해놓은 것을 '손대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을 가장 중요한 정신으로 삼는다.
그리고 나는 '손대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이라는 것에서 깊은 울림이 느껴졌다.
먼 타국에서 이 작품을 마주했지만, 작품 속에는 한국의 깊은 산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정기와 숨결이 고스란히 실려 있었다. 마치 고향의 기운이 작품을 타고 이곳까지 도착한 한 통의 편지 같았다.
문득, '이 작품을 내가 소장 할 수만 있다면.......'이라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이번 전시를 다녀오면서,
한국 작가님들의 작품은 단순히 예쁜 그림이 아니라,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떤 마음을 가진 사람인지 자연스레 떠올리게 해 주었다.
유능한 한국 작가들이 영국에서 인정받고 작품을 선보이는 모습을 보니
같은 민족이라는 사실이 새삼 자랑스럽기도 했다.
우리의 정서와 아름다움이 이곳 영국 사람들에게도 천천히 스며들어
작은 울림으로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도 함께 일었다.
멀리서 살아도 변하지 않는 한국의 감성이 마주하니
뭔가 모를 긴장 속에서 살다, 오랜만에 마음 깊은 곳까지 숨을 들이켜는 듯한 편안함이 찾아왔다.
작가님들의 작품에서 받은 이 따뜻한 위로와 울림은 아마도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아 나를 지켜줄 것 같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