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오늘, 열쇠를 받았다.

길고긴 대장정의 마침표.

by Stella

우리가 이곳에 뿌리를 내리기까지


영국에서의 삶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던 어느 시기,

우리는 매년 반복되는 월세 인상에 조용히 지쳐가고 있었다.

계약서에 찍힌 숫자는 우리가 얼마나 취약한 위치에 있는지를

매번 새로 확인시켜 주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음속에서도 쉽게 꺼내지 못하던 문장이

불쑥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우리..조금 무리해서라도 집을 알아볼까?"


이런 저런 이유로 오랜 시간 망설였지만,

결심이 서고 나니 기다렸다는 듯 집을 보기 시작했다.

사실 남편 회사 근처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동네가 하나 있었다.

'언젠가 집을 산다면 이곳에서 살 수 있으면...'했다.


결국 우리가 선택한 집은

그 동네의 작은 신축 주택 단지였다.

아직 땅 위에 형태도 갖추지 않은,

그저 도면과 조감도로만 존재하는 집.


건설사 직원이 아기자기 잘 꾸면진 모델하우스에서

''여기서 살게 될 거예요."라고 말하던 순간,

나는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 마음을 기대는 일은

마치 아직 만나보지 않은 미래에게

예약을 걸어두는 일 같았다.


빛이 가장 오래 머무는 방향을 고르고,

층을 선택하고,

도면 속 네모난 방들을 상상 속에서 걸어 다니며

우리는 한참 고민했다.

아직 세워지지 않는 집을

이렇게 먼저 사랑하게 될 줄이야.


전자계약서에 사인을 하며 'Next page'로 화면이 넘어가는 순간,

우리 삶의 다음 장을 넘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남은 것은 기다림이었다.


기다림이라는 시간의 두께


집이 지어지는 동안

우리는 종종 공사 현장 근처를 산책했다.

(사실 거의 매주 놀러갔다.)


철골과 콘크리트가 어딘가 어설픔 모습으로 놓여 있을 때면

우리는 서로에게 물었다.


''저 집이...진짜 우리 집 맞지?"


멀리서 보면 그저 비슷비슷한 건물들일 뿐인데

이상하게도 그중 하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6개월이라는 시간이 천천히 쌓여가는 동안

우리도 조금씩 달라졌다.

영국에서의 생활은 여전히 낯설지만

그 낯섦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보이지 않는 기둥이 하나 생긴 것 같았다.


곧 우리를 품어줄 공간이 있다는 사실이

기다림을 버티게 해줬다.


그리고 마침내, 열쇠 한 조각


건설사에서 아기자기 나열해놓은 각종 열쇠들 ^^


키를 건네받는 순간,

금속의 차가운 무게가

그동안의 시간들을 한꺼번에 불러냈다.


처음 공항에 도착했을 때의 불안,

영국식 억양에 적응하느라

서로를 붙잡고 웃어넘기던 나날들,

낯선 나라에서 하루하루를 쌓아 올리며 버텼던

우리의 3년이 열쇠 위에서 반짝이는 것 같았다.


이민자의 삶은 늘 임시적이다.

떠날 수도, 떠나야 할 수도 있는 삶.

그 불안정함 속에서

'집'이라는 단어는

공간을 넘어 하나의 감정처럼 다가온다.


새 집은 난방도 켜지지 않았는데

왠지 따뜻했다.

우풍 없는 집이라는 실용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비로소 "내가 원하는 만큼 머무를 수 있는 삶"을

만난 것 같아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집도 인연이 있다면


나는 한국에서도 오래도록 '내 집'을 꿈꿨다.

하지만 아무리 간절히 손을 뻗어도

단단한 현실 앞에서 자꾸만 멀어지곤 했다.


그 금속덩어리가

한국이 아니라 지구 반대편에서,

여러 번의 망설임과 좌절을 지나

오늘 내 손에 들어온 것을 보면

집도 사람처럼

만나는 시기가 있고, 인연이 있는 곳이 있는 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좋든 싫든,

이곳이 우리가 뿌리를 내릴 장소라면

나는 이곳을 가만히 안아보려고 한다.

우리가 지나온 시간들을 품고도 남을 만큼

넉넉한 마음을 가진 집이길 바라면서.


잘 부탁해, 우리 보금자리.

그리고 앞으로의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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