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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과 글로 남은 꿈

창덕궁 부용지, 강진 다산초당

by 월하랑


바라보고 있으면 눈물이 나는 정원이 있다. 부용지가 그렇다. 이 정원에서 정조는 얼마나 치열하게, 외롭지만 티 내지 않고, 항상 강해 보이는 왕이 되려고 노력했을까? 자신의 세력을 만들고, 그들과 함께 꿈을 꾸고, 이상향의 세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정조의 아지트, 부용지로 들어가 보자.




정조의 아지트


동궐도 부용지


왕위 계승을 반대하는 방해공작과 그를 해치려는 시도들, 왕이 되기 전 수많은 위협을 겪었던 정조다. 책 속에서 위안을 얻었던 어린 정조는 후원 초입의 언덕에 열고관과 개유와라는 도서관을 짓고 많은 시간을 보냈다.


부용지 지형 단면도 (출처: 창덕궁 태액지의 조영사적 특성 / 정우진, 심우경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30권 2호)



열고관과 개유와에서 어린 정조는 작전을 짠다. 저들이 바라는 나약한 왕이 될 순 없었다. 백성을 유린하며 권력을 향유하는 자들이다. 백성을 위해 강한 왕이 되기 위해서는 치밀한 계획이 필요했다. 열고관과 개유와가 있는 언덕에 서서 고민했다. 정조는 그 안에서 답을 찾았다.


1776년, 정조의 작전이 시작된다. 왕이 된 직후, 정조는 규장각을 지을 것을 선포한다. 창덕궁 후원, 열고관과 개유와 맞은편 언덕 위로 규장각의 자리를 결정한다. 이후 5년의 시간 동안 대대적인 공사가 진행되고 부용지라 불리는 규장각 일대가 완성된다. 정조는 두 번째 작전을 개시한다. 바로 ‘초계문신제도’의 거행이다. 만 37세 이하의 젊고 유능한 문신들을 규장각에 위탁해 교육을 받게 하는 제도라 말하지만, 실상은 초계문신들을 노론을 대적할 자신만의 세력으로 기르는 것이었다.


부용지 배치도 (좌: 동궐도형 / 우: 창경궁급비원평면도) (출처: 위와 동일)




부용지의 핵심은 지형 활용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 지형을 활용해서 왕의 권위를 연출하였다. 또한 경사지의 시작 지점에 비취색 병풍인 '취병'을 배치해 두 공간을 분리시키면서 동시에 연결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가장 높은 건물인 주합루와 가장 낮은 건물인 부용정은 서로를 마주 본다. 주합루에서 부용정을 내려다볼 때는 왕의 높이를 느끼게 하고, 부용정에 앉아 규장각과 주합루를 배경으로 삼는 왕은 물에 뜬 신과 같은 존재가 된다.


창덕궁 부용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주합루와 규장각, 어수문과 섬, 그리고 부용정까지 이어지는 중심축은 왕의 권력을 상징한다. 주합루에서 시작된 강한 축선은 열고관과 개유와로 이어진다. 세손 시절, 이 모든 것들을 계획하고 생각해낸 곳이다. 정조는 주합루 맞은편, 열고관과 개유와를 바라보며 홀로 있던 지난날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 유능한 신하들과 함께다. 힘들고 지칠 때면 주합루에 올라 자신이 완성한 정원과 맞은편 세손 시절 도서관을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았을 정조를 떠올려본다.


창덕궁 부용지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조가 왕의 권력을 드높이고자 했던 이유는 그만큼 자신의 사람들에게 든든한 왕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사람들을 지키고 싶었고 안정감 속에서 정책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부용지에서 정조는 자신의 이상향을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계획들을 실천해 나간다. 새로운 활자를 개발하였고, 수많은 서적을 수입하고 간행했다. 서얼을 등용하였으며, 상업을 키우기 위해 새로운 정책을 추진한다. 도성 중심의 기득권을 약화시키고, 수원에 화성을 건설하며 선진적인 농법과 농업 경영을 추진한다.






유배지의 정원


부용지가 완성된 지 20년이 되던 1800년, 정조가 49세의 나이로 허망하게 죽는다. 20년 동안 일궈놓은 성과들이 하나씩 해체된다. 정조가 지키고자 했던 이들이 처단된다. 강진의 다산초당은 정조가 지키고 싶었던 한 사람, 정조의 마음을 잘 헤아렸던 한 사람,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이다.


다산초당도 (출처: 문화유산채널)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어렵게 자리를 잡는다. 다산초당에서의 12년 동안 정약용은 500여 권의 책을 쏟아낸다. 왕도정치가 실현되는 이상적 사회를 꿈꾸며 현실 개혁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한다. 정조와 함께 나누었던 꿈이다. 부용지 주변을 거닐고, 주합루 아래를 내려다보며 함께 나눴던 대화다. 왕은 없고 그는 유배된 신세지만 책으로 남긴다면, 누군가 읽고 언젠가 실현되는 날이 올 것이라 기대하며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심서다.


다산초당과 연지석가산


다산초당은 산 중턱에 햇빛도 잘 들지 않는 곳에 있다. 초라한 유배지에 연못이라니, 부유한 기와집에서도 드문 일이다. 지금도 잉어가 살고 있는 연못은 정약용이 다산4경이라 부르며 아끼던 공간이다. 정약용은 초당을 비울 때면 잉어의 안부를 물었고, 잉어가 헤엄치는 모습만 보고도 날씨를 예상할 정도로 자주 들여다보았다고 한다.


정약용이 초계문신이던 시절 부용지에서의 일을 기록한 글이 있다. 정조는 종종 부용정에 앉아 문신들에게 즉흥시를 짓게 했는데 이때 시를 완성하지 못한 이는 부용지 가운데에 있는 섬으로 유배 보내졌다고 한다. 시 짓기에는 자신 있었지만 부용지에서 잉어를 잡는 낚시 대회가 열리면 거의 대부분 유배를 당하곤 했다고 정약용은 기록한다.


잉어를 바라보며 부용지에서의 추억들이 떠올라 미소 짓었을 정약용을 상상해본다. 초당에 틀어박혀 밤낮으로 저술 작업에 몰두하다 몸과 마음이 지치면 지당으로 발걸음을 옮겼을 것이다. 정조가 부용지를 만들고 함께 할 이들을 모았듯이, 정약용은 다산초당에 지당을 만들고 제자들과 함께 수 백 권의 책을 써낸다. 정조가 남모르게 정원에서 마음을 달랬듯이, 정약용 역시 연못을 보며 힘든 유배지에서의 세월을 견뎌낸다. 그렇게 보니 초당이 규장각으로 변하고 작은 연못은 부용지와 같아 보였다. 치열한 마음으로 백성을 위했던 두 지도자의 정원은 멀지만 이토록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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