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 따라 떠나는 정원_여름
더운 여름, 피서가 아니라면 밖을 다니는 것이 고문일 텐데도 명옥헌의 여름은 인기다. 연못 주위에 가득 핀 백일홍이 장관이다. 명옥헌에 가을이 오면 여름 한철의 뜨거운 사랑은 열기가 식는다. 인파가 북적이던 명옥헌에 고요가 찾아온다. 사람의 목소리에 묻혔던 물소리가 다시 정원을 나지막이 채우고, 백일 동안 피던 꽃은 떨어지고 낙엽이 물든다. 영조시기 황해도에서 화원을 짓고 꽃에 대한 품평을 했던 유박은 그의 저서 화암수록花庵隨錄에 배롱나무를 ‘속우俗友’라 하였는데, 나는 그것이 배롱나무의 수피를 두고 하는 말 같다. 사람의 근육 같은 배롱나무의 수피를 보면 마치 누드모델이 취하는 아름다운 포즈 같다. 빗방울에 조금씩 젖어드는 배롱나무를 보면, 다부진 몸에 땀방울이 흐르는듯하다. 고상하지 못하고 속된 나는 벗은 몸에 땀방울이 흐르는 듯한 배롱나무를 보며 정원에 혼자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여름에 아름답던 정원이 가을이 오면 망가지기도 한다. 지당에 연꽃이 가득 핀 곳 일 수록 그렇다. 여름이면 넓은 연잎과 꽃이 장관을 이루던 곳이 가을이 오면 연잎이 지고 말라비틀어져 물에 둥둥 떠다닌다. 신라의 정원 ‘동궁東宮과 월지月池 ’를 발굴 조사할 때 못에서 우물 정자형의 연꽃을 심는 귀틀이 발견되었다. 연꽃은 한번 심으면 번식력이 강해서 연못을 뒤덮는다. 연꽃으로 뒤덮인 연못은 가을의 추함을 가릴 수 없다. 신라시대에도 이를 알아 연꽃이 퍼져나가지 않도록 귀틀 안에 가둬놓고 키운 연꽃을 지금은 속수무책으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다. 영양의 서석지, 담양의 임대정을 가을에 간다면 갈색으로 녹아내린 연꽃으로 뒤덮인 지저분한 정원을 보게 될 것이다. 정원이란 잠시라도 관리하지 않으면 본래의 아름다움을 잃는다. 일본에서는 정원문화유산을 수리하는 전문 업체가 정원을 위탁 관리 한다. 수시로, 상시로 관리해야 하는 정원을 아름답게 가꾸면서 동시에 그에 걸맞은 프로그램들도 운영한다. 차문화 교육이나, 때로는 결혼 피로연을 열기도 하는 일본의 정원문화유산을 보며 우리도 죽어 있는 정원유적이 아닌 살아 있는 정원이 되기를 바라본다.
봄에 반갑게 핀 꽃들에 설레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금방 저물고 마는 벚꽃, 매화꽃, 복숭아꽃에 드는 서운한 마음을 모란과 작약이 초여름까지 버텨주며 위로해 준다. 우리나라의 3대 화계인 경복궁 아미산 화계, 창덕궁 대조전 화계, 그리고 낙선재 화계에 가면 다른 꽃들에 비해 큼직한 꽃을 자랑하는 모란과 작약을 볼 수 있다. 신라 때 당으로부터 들어온 것으로 알려진 모란은 고려시대 때 귀족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부귀를 상징하는 꽃으로 조선시대에도 많은 그림과 옷에 그려진 모란은 중국에서 온 것을 알아서 그런가, 다른 수종들에 비해 화려하고 큰 꽃에 이질감이 든다. 그래도 청순한 봄꽃들이 지고 난 후에 핀 이국적이고, 풍성한 꽃은 계절이 바뀐 정원이 다른 매력을 발산할 수 있게 해 주는 고마운 존재다.
한국정원의 가치를 전합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정원의 아름다움과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쓰고 말합니다. 언젠가 많은 사람들이 한국 정원에서 우리 문화를 느끼고, 해외에서 온 여행객의 일정표에 우리 정원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우리 정원 문화가 널리 알려지길 바랍니다.
달빛 아래 너랑 나랑, 월하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