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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하랑 Mar 08. 2024

빛을 머금은 하얀 돌

영양 서석지瑞石池


처음 맞이하는 순간이 중요한 한국 정원들이 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장면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몇몇의 한국 정원은 시작지점이 실제 정원과 꽤나 떨어져 있다. 영양 서석지瑞石池는 대문에서 남동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석문石門에서 시작한다. 자금병과 가지천이 만나는 곳에 우뚝 솟은 기암절벽과 맞은편 골립암이 만들어낸 자연의 문인 석문은 서석지의 주인인 정영방의 호號이기도 하다.


출처: 유튜브(자연을 품은 한국의 전통정원] 제2편 영양 서석지 일원) 캡쳐


서석지의 주인 정영방(1577~1650)은 영양 사람이 아니다. 영양에서 서쪽으로 100km 떨어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났다. 예천에서의 그의 삶은 밝지 않았다. 그가 살다 간 16세기 중반에서 17세기 중반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피폐함이 만연했던 시기였다. 임진왜란은 십 대 시절 그에게 큰 사건이었고, 병자호란은 60대의 그가 세상에 미련을 버리고 서석지로 들어가 은둔을 시작하게 만든 계기였다.


그는 5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14세에 홀어머니를 떠나 대를 잇기 위해 큰댁에 양자로 들어갔다. 가족과 생이별하는 아픔이 채 아물기도 전에 16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눈앞에서 형수와 누님이 절벽에서 떨어지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가 예천을 떠나 영양의 임천에 거처를 정한 분명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예천에서의 상처와 영양 임천의 그 무엇이 고향을 떠나 타지에 새로운 터전을 자리 잡게 만들었을 거라 짐작해 본다.


주변 자연 지형이 가진 독특한 분위기는 정원과 관련이 깊다. 석문에서 볼 수 있는 노출된 흰색의 자연 암반과 서석지 연못의 흰 돌들은 영양만이 가진 암반의 특징이다. 골립암 맞은편 두 물줄기가 만나는 지점의 절벽은 서석지의 규모를 장엄하게 한다. 정돈되지 않은 돌 사이의 주름들은 꾸밈없이 거칠다. 자연 지세를 그대로 담고 있는 계곡 주변의 돌 군락을 발견한 정영방은 이를 지당의 바닥으로 삼고 주위에 호안을 쌓았다. 보통 지당을 만드는 것은 물을 감상하기 위함인데 서석지의 지당은 돌을 감상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자연적으로 거칠게 마감된 돌들의 표면은 특별한 뜻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러 개로 보이는 암석은 일부만 물에 잠겨 있어 실은 하나의 암석일 수도 있다. 여러 가지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암석은 주인이 지어준 각각의 이름과 뜻이 있다. 바둑을 두는 바위, 신선이 노니는 바위, 용이 누운 바위 등 돌의 형상과 위치에 빗대어 여러 가지 이름을 지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바위의 이름은 상경석尙絅石이다.



지당에 물이 차 있을 때는 보이지 않다가 물이 빠졌을 때 보이는 돌이다. 상경尙絅은 그대로 해석하면 ‘오히려 홑 옷을 입는다.’는 뜻이다. ‘홑 옷’은 한 겹으로 된 옷으로 ‘비단옷을 입을 수 있지만 오히려 겉에는 홑 옷을 입는다.’는 시경詩經의 의금상경衣錦尙絅에 가져온 말이다. 정영방은 서석지의 두 건축물인 경정敬亭과 주일재主一齋 사이에 있는 낮은 돌에 상경석이라 이름을 짓고 이렇게 말한다.


돌도 아름다운 광채를 머금고도 나타내기 꺼리는데, 어찌 사람이 실상에 힘쓰지 않고 명예만 얻으려고 급급하는가? 군자의 도는 은은하되 날로 드러나고, 소인의 도는 선명하되 날로 없어지는 것이다. - 정영방

서석지원의 조영배경과 공간구성에 관한 연구 / 한국전통조경학회 / 2003(21권 4호) / 김동훈, 김용기, 김두규 / 일부 변형


인조반정 이후 그의 스승인 정경세가 정영방을 천거하려고 하자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며 사양하였다. 정영방이 왜 그리 중앙 정치에 몸 담기를 꺼렸는지는 알 수 없다. 어릴 적 상처로 인해 우울증을 겪었는지, 타고나길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것인지, 혹은 중앙 정치에 함부로 몸담았다가 일가족이 몰살되는 것을 걱정했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서석지는 세상에 나가길 꺼린 사람이 만든 은둔자의 정원임은 분명하다.



서석지의 골격


서석지의 구성은 보기에는 단순하지만 여러 가지 측면에서 독특하다. 첫 번째는 건물의 향이다. 무이산의 산자락을 뒤로하고 앞에 흐르는 강을 바라보게 배치했을 수도 있지만 동남쪽을 향하도록 하였다. 아마도 경정에 앉았을 때 석문이 보이게 하는 차경 효과를 노린 것으로 보인다. 이때 대문을 남쪽에 건축물과 같은 향으로 조성했다. 담장의 한 면은 일직선인 것이 일반적이지만, 문과 담장을 직각으로 두어 오른쪽 담장과 왼쪽 담장의 라인을 달리했다. 이렇게 의도적으로 담장을 연결하지 않고 문을 꺾는 이유는 열자마자 주인이 거처하는 주일재가 바로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함과 시선을 지연시킴으로써 정원에 대한 기대감을 한층 높이고자 함이다.


좌: 서석지의 대문 밖에서 / 우: 안에서 바라본 대문
은행나무 가지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지만 라인을 달리하는 서석지 대문 담장의 모습


두 번째는 경정과 지당의 관계이다. 경정은 지당 북쪽에 거의 붙어 있는 수준이다. 분명 땅 위에 지어졌지만 경정 대청마루에 앉으면 물 위에 떠 있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정자의 기둥 일부를 지당에 넣는 것은 겸손하게 은둔하는 자의 정원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땅 위에 지으면서도 물에 아주 가깝게 지어 물에 뜬듯한 효과는 누리도록 하였다.



세 번째는 주일재 앞의 사우단四友壇이다. 이름은 단壇이지만 호안의 일부로 다른 지형보다 높지는 않다. 일반적인 방지方池가 아닌 ‘ㄷ'자 형의 지안이 된 이유는 바로 주일재 앞에 매송국죽梅松菊竹을 심기 위해서다. 정영방은 우복 정경세의 수제자로 정경세는 퇴계 이황과, 사애 류성룡의 계보를 잇는다. 그런 그가 도산서당 옆의 절우사節友社와 같은 매송국죽을 집 앞에 심어놓은 것은 은행나무와 함께 군자의 상징이자 자신의 계보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 작은 정원이 소쇄원, 보길도 윤선도 원림과 함께 한국의 3대 정원으로 거론되는 것은 담장 안 정원의 깊이와 주변의 넓은 자연경관을 모두 정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빛을 머금은 하얀 돌은 정영방 자신이었을 것이다. 빛을 머금고 세상에 나가지 않고 낯선 곳에서 단단한 돌이 된 그의 삶을 서석지에서 엿볼 수 있다.



참조

_석문 정영방의 원림과 문학 / 한국한문고전학회 / 2018 / 신두환

_서석지원의 조영배경과 공간구성에 관한 연구 / 한국전통조경학회 / 2003(21권 4호) / 김동훈, 김용기, 김두규 / 일부 변형

_시학(상상력)적 정원, '서석지'에서의 공간 점유 방식 / 경기대학교 건축전문대학원 / 2002 / 김지환




한국정원의 가치를 전합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정원의 아름다움과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쓰고  말합니다. 언젠가 많은 사람들이 한국 정원에서 우리 문화를 느끼고, 해외에서 온 여행객의 일정표에 우리 정원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우리 정원 문화가 널리 알려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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