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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하랑 Dec 20. 2024

신라, 백제 정원도 있었다는 사실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는 대부분의 정원 유적들은 조선시대의 것들이다. 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고구려를 제외한 신라와 백제의 정원들이 있다. 옛 정원에는 조선시대와 달라도 너무 다른 매력이 있다. 조선의 정원은 유교를 기본으로 하지만, 도교와 예부터 전해져 오는 민간 신앙의 요소도 바탕에 깔려있다. 조선 이전의 정원에서는 좀 더 날것의 미를 느낄 수 있다. 


동궁과 월지는 경주 여행의 필수코스이다. 월지의 야경을 감상하며 한 바퀴 걷는 것은 내게도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 있다. 본격적으로 정원 유산을 공부하고 난 뒤 전국을 답사하면서 우연히 돌 전문가를 만나게 되었다. 한국 정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항상 돌이었다. 그렇게 우연히 만나게 된 돌 전문가는 경주 동궁과 월지의 천 개의 돌을 잘 살펴보라고 했다. 돌을 어떻게 놓을 것인가는 정원 조성의 중요한 기술이다. 어떤 질감의 돌을 선택하고, 어떤 면을 선택해서 얼굴로 사용하며, 다른 돌들과는 어떤 관계를 맺으며 위치를 선정할지는 전문가의 영역이다. 어떤 크기의 돌들을 어느 정도의 간격으로 두는지에 따라 전체적인 분위기가 달라진다. 그런 돌 전문가가 내게 해법을 가르쳐 주었으니, 바로 동궁과 월지를 잘 살펴보라는 것이었다. 



월지의 돌


야경으로 유명한 동궁과 월지의 평일 낮은 사람 없이 한산했다. 아침 일찍 방문해서 거의 혼자 있는 느낌이었다. 밤에는 볼 수 없었던 천 개의 돌이 정말 있었다. 돌들은 개별적으로 놓인 것이 아니었다. 모두 어떠한 군락에 속해 있었다. 뒤에서 봤을 때 하나의 군락이라고 여겨졌던 것이 옆에서 보면 구도를 달리하여 조금 떨어져 있는 돌을 끌고 와 또 다른 군락을 이루었다. 단순한 배치가 아니라 돌들 사이의 관계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한 치밀한 계획이 있는 듯했다. 신라인들은 돌을 깎는 것에만 전문가가 아니었다. 돌을 놓는 것에서도 그랬다. 돌의 군락들을 계속 보니 전체를 아우르는 한 가지 특징이 느껴졌다. 정원의 지형은 뭍에서 땅으로 갈수록 경사져 있었다. 물가의 돌들은 대부분 누워 있는 모습이었다. 납작한 돌도 많았다. 납작한 돌 뒤쪽에는 그보다는 조금 세워진 돌이 있었다. 그다음 돌들은 조금 더 세워져 있었다. 결국 가장 뒤쪽에 있는 돌들은 거의 서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각도가 90도를 넘어 쏟아질 것 같은 돌은 없었다. 모두 땅에서 굳건히 일어서 안정감 있는 모습이었다. 모든 돌은 앞쪽보다는 일어서지만 뒤쪽보다는 누워 있는 위계 속에서 구도를 달리하며 앉아 있었다. 위계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다양한 배치를 보이는 것이 천 개의 돌에서 보이는 공통적인 특징이었다. 돌 하나하나가 아름답다고 할 순 없었다. 오히려 돌과 돌 사이의 공간에 눈이 갔다. 관계가 없다면 아름답지 못할 돌들이었다. 


동궁과 월지의 정확한 용도는 아직 모른다. 얼마 전만 해도 동궁이기 때문에 태자의 정원이라고 했었는데, 최근 기존의 동궁과 월지 담장 너머 또 다른 정원유적이 발굴되면서 지금의 월지는 왕의 정원이고, 동편의 독립된 정원이 태자의 정원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용도는 정확하지 않지만 조성 이유는 알 수 있다. 월지가 만들어진 것은 674년, 나당전쟁이 한창인 시기였다. 백제와 고구려는 정복한 후였고, 당을 물리치지 않으면 삼국통일을 완성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당을 물리치는 것과 세 나라가 하나의 국가라는 인식을 갖게 하는 것은 신라가 풀어내야 할 난관과 숙제였다. 월지는 완전한 통일을 기원하며 만든 정원이다. 국가의 모든 동력을 모아 전쟁에 집중해도 모자란 시국에 정원을 만든 것은, 월지가 단순한 정원이 아닌 통일을 염원하는 뜻의 정원이었기 때문이다. 월지의 수체계는 동북쪽에서부터 물이 내려와 월지의 동남쪽으로 입수되어 다시 동북쪽으로 빠져나가는 구조이다. 남쪽의 가장 큰 섬을 신라, 가운데 작은 섬을 백제, 서북쪽의 중간 크기의 섬을 고구려라 한다면 세 나라가 힘을 합쳐 북쪽으로 당나라를 물리치듯 물이 빠져나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월지로 입수되는 물은 주술적인 힘이 담겨 있다. 두 단의 거대한 수조 사이에는 석누조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홈이 있다. 석누조는 물이 밖으로 흘러빠지도록 만드는 물홈돌('석누조', 김왕직, <알기쉬운 한국건축 용어사전>, 2007)로 아무 문양이 없기도 하지만 용이나 거북과 같은 동물의 머리로 장식하기도 한다. 신라는 민간신앙으로 ‘용’을 믿었다. 추측하기로는 용머리 모양의 석누조가 있었을 것 같다. 용의 입을 통해 나온 물로 세 나라가 하나의 정원이 되고 그렇게 당을 북으로 쫓아내는 듯한 구조이다. 정원 완성 2년 후, 신라는 삼국통일을 이뤄낸다. 3년 간 나라를 정비한 다음에야 임해전이라는 건물이 지어진다. 정원 향유가 목적이었다면 건축을 5년 후에 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월지는 성공적으로 주술적 기능을 해냈고, 이후 왕궁의 정원이 된다.



월지의 석조

 

경주에는 동궁과 월지 말고도 ‘구황동 원지’와 ‘용강동 원지’라는 신라시대의 정원이 더 있다. 세 정원의 공통점은 못과 섬의 형태가 남해안이 떠오르는 구불구불한 형태라는 것과 자연석을 군데군데 두어 장식하였다는 점이다. 일본의 정원은 바로 이러한 신라의 정원에서부터 영향을 받았는데, 사실 신라와 일본의 정원 문화에 영향을 준 것은 백제이다. 하지만 백제 정원의 원형은 남아 있는 것을 찾기 쉽지 않다. 가장 유명한 부여의 궁남지는 상상해서 만든 것으로 본모습이 아니다. 현재로서는 익산의 왕궁리가 백제 정원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처음에 왕궁으로 기획되었지만 사용해보지도 못하고 백제가 멸망했다. 이후 사찰로 사용되기도 하다가 잊혔던 유적의 중간 정도에서 작은 규모의 정원이 발견되었다. 발굴조사가 시작된 것은 1989년이지만 정원이 발굴조사의 주제가 되기 시작한 건 근래의 일이다. 처음 익산 왕궁리의 백제 정원 유적 발굴 보고서를 보고, 그토록 기다리던 백제 정원의 실물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무척 설렜다. 하지만 막상 도착하고 보니 정원 유적은 비닐로 덮여 공개되지 않았다. 구황동 원지 역시 연구하신 박사님과 함께여서 겨우 잠겨진 자물쇠를 풀고 안으로는 들어갔었지만 사람키만큼 자란 잡초 때문에 도저히 관람할 수 없었다. 용강동 원지는 허망하게 버려진 땅처럼 남겨져 있었다. 우리나라에 정원 유산이 있냐고 모두들 묻는다. 반만년의 무구한 역사가 있고, 건축문화, 제례문화, 음식문화 등이 발전한 우리나라에 정원문화가 왜 없겠는가? 다만 도자기, 탑과 같은 동산문화유산의 뒷전, 건축의 뒷전으로 여겨지기에 존재 자체가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본래 우리나라는 경관이 가장 먼저고 그다음에 건축과 도자기 등이 있는 것이다. 20세기의 한국미학자 조요한의 책 ‘한국미의 조명’에서 하나의 장에 해당할 만큼, 중요한 한국미의 본류였던 정원이 어째서 이렇게까지 뒷전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2014년에는 실상사라고 하는 사찰 앞에서 고려시대 정원 유적이 발굴되었다. 남한에 존재하는 몇 안 되는 고려시대의 정원이고, 규모도 작지 않고 구조도 특이해서 기대되었다. 하지만 역시나 거기까지였다. 발굴조사 이후로는 어떤 후속 조치도 없었다. 한국 정원 이야기를 쓰는 이유다. 다른 문화 유산과 같은 대우를 받길 바란다. 다른 어떤 유산만큼이나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긍심을 불러일으키고, 영감을 줄 수 있는 문화유산이기에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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