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월유화 Mar 08. 2021

엄마는 연년생을 어떻게 키웠을까

애를 안아 들어 올릴때나 기저귀를 갈러 내려 놓을때 "아구구구. 어이구 허리야. 아우 손목아" 곡소리가 절로 나오는데 그걸 들은 엄마는 뭐 그리 유난이냐고 핀잔을 늘어놓기 일쑤이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24살에 나를 낳아 쌩쌩했겠지만 나는 41살에 애를 낳았으니 삭신이 쑤시는게 당연하다"며  노산 유세를 신나게 떨고는 "아이고 나 죽네"를 덧붙인다.

그럼 엄마는 누가 그렇게 다 늙어 애를 낳으랬냐며 늘 그렇듯 아기를 대신 안아주신다.


코로나 때문에 남편도 재택근무에다가 엄마도 같이 애를 봐주시는데도 왠지 모르게 나는 바쁘고 힘들다. 내가 육아에 재능이 하나도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희한하게 몸은 매일 천근만근이고 늘 동동 거리며 집안을 돌아다닌다. 애가 울면 나 대신 울 엄마가 달래주는데도 나는 그 옆에서 괜히 안절부절이고 밥 먹을 때에도 엄마가 애를 봐주시니 좀 천천히 먹어도 되련만 마음에 여유가 없어 허겁지겁 먹다보니 체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몸도 마음도 내 뜻대로 안따라줄 때마다 엄마가 나를 낳았던 그 젊은 나이가 참 부럽다.  

물론 내가 24살에 애를 낳았다고 해보면 '그 한창 하고 싶은 것 많은 꽃다운 시기에 애엄마라니?' 하는 생각에 몸서리가 쳐지지만.


나는 지금 아기 하나도 힘들어 죽겠는데 엄마는 나를 낳고 다음 해에 또 내 여동생을 낳았다.

내가 연년생으로 애를 낳았다면? 정말 상상도 하기 싫다. 엄마 역시 어린 나이에 우리를 낳았어도 연년생 둘은 보기가 힘들었는지 외할머니와 이모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인지 우리 자매는 이모들하고 정말 친하다. 우리가 좀 커서도 이모들하고 떡볶이도 같이 사먹으러 다니고 친구처럼 지냈었다.


엄마와 이모들이 고생을 많이 해준 덕에 나는 내 동생과 잘 먹고 잘 자랐고, 지금 우리가 가진 것에 감사하며 잘 살고 있다. 엄마와 이모들, 나와 내 동생, 그리고 내 동생의 세살 터울 딸들을 볼 때마다 우리 딸이 외동인 것이 안타까울 때가 있다. 난 절대 둘은 못키운다 생각했지만 그래도 가끔은 자식들이 늙어서도 친구처럼 서로 의지하며 살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어쩌랴. 지금 내 상황을 보면 그냥 외동딸로 만족할 수 밖에. 나이가 있어 하나를 더 낳으려면 연년생 밖에 답이 없는데 나도 늙었고 엄마도 늙었고 내 동생도(우리 딸 기준에서 보면 이모) 늙었다.

늙은이들의 고군분투는 애 하나로 족하다. 지금 더 낳는다는 것은 너무 욕심인 걸 잘 알기 때문에 아쉬운 마음 달래는 요즘이다.









작가의 이전글 "괜찮아" 한마디에 산후우울증이 사라졌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