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책감이라는 이름의 기억
겨울방학, 아이와 먹는 늦은 아침이었다.
식탁에 나란히 앉아 태블릿으로 '풍향고'를 틀어두고,
느긋하게 아침을 먹었다.
아이는 후식으로 귤을 까먹고 있었고,
나는 별생각 없이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럽 여행 중 사진을 찍는 장면이 흘러가던 순간이었다.
아이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예전에 제주도 여행을 갔을 때,
외할아버지에게 디카로 사진 찍는 법을 배웠다며
그때의 이야기를 꺼냈다.
"예전에 우리 외할아버지랑 제주도 여행 갔었을 때
할아버지가 나한테 카메라로 사진 찍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잖아.
그때 생각나네. 그 카메라가 무슨 카메라야? 엄마?"
"아.. 그거? 디지털카메라, 디카."
"그럼, 그 디카 지금 어딨 어?"
"아, 그거.. 외할아버지 유품 정리하면서 버린.. 것 같은데.. 왜..?"
"아.. 그 디카 나 줬으면 내가 쓸까 했는데.."
아이의 그 말에 마음이 먼저 반응했다.
기억해 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가슴이 찡해졌다.
눈물이 올라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
다 먹은 식탁 위 그릇들을 괜히 정리했다.
콧물까지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고
화장실로 달려가 눈물과 콧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아무 일 없다는 얼굴로
다시 식탁 앞에 앉았다.
아이는 여전히 '풍향고'를 보며 귤을 까고 있었다.
그러다 내 얼굴을 슬며시 들여다보더니 물었다.
"엄마, 울어?"
"응.. 네가 외할아버지 얘기하는 바람에.."
그 대답은 사실 반쯤만 맞았다.
단순히 돌아가신 아빠가 생각나서 운 것은 아니었다.
후두암 수술로 목소리를 잃으셨던 아빠는
말을 할 수 없었고,
아이는 그런 할아버지와 누구보다 많이 눈을 맞췄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듯,
할아버지의 표정과 손짓을 끝까지 따라주었다.
그 모습이 늘 고마웠다.
그리고 볼 때마다 마음 한편에
왠지 모를 감정이 일었다.
아이가 할아버지와 함께 있는 장면을 볼 때면
어린 시절의 내가 겹쳐 보였다.
앞이 보이지 않으셨던 나의 외할머니와
그 곁에 서 있던 어린 나였다.
"00아~ 00아~ 보리과자 먹어~ 보리과자.."
그 목소리를 나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기억과 달리 마음은 늘 솔직하지 못했다.
어린 마음에 외할머니는
부담스럽고, 싫고, 피하고 싶은 존재였던 것 같다.
그 감정을 그때의 어린 나는 숨기지도 못했고,
지금의 나는 부정하지도 못한다.
그래서일까.
목소리를 잃은 외할아버지에게
가족 누구보다 눈을 맞추고
자연스럽게 소통하던 내 아이를 볼 때면
어린 시절의 내 부끄러운 얼굴이 떠올랐다.
고마움과 부끄러움이
늘 함께 밀려왔다.
그 감정이 지나가면
뒤이어 또 다른 마음이 찾아왔다.
후두암에 걸려 목소리를 잃은 아빠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내가 겪은 어린 시절과 비슷한 상황을 손녀에게도 물려준
아빠에 대한 원망.
그런 마음을 품었던 나는
참 못되고, 못난 딸이었다.
외할머니를 떠올리면 미안함이 먼저 왔고,
아빠를 떠올리면 원망과 미안함이 겹쳐졌다.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의 바닥에는
늘 같은 이름의 마음이 남아 있었다.
죄책감.
살아오면서 외할머니에게 느꼈던 미안함,
아빠에게 품었던 원망과 미안함,
나와 다르게 아픈 할아버지를 대하는 아이를 보며
느꼈던 고마움과 부끄러움.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모든 감정이 결국
하나의 마음으로 모여 있었다.
죄책감이라는 이름으로.
그래도,
아이가 기억해 준 이야기 덕분에
나는 처음으로
그 감정을 조금은 다르게 바라보게 되었다.
기억해 준다는 것은
사랑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다고,
말하지 못한 마음을 대신 이어주는
가장 조용한 방식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날의 나는 생각했다.
늦은 아침,
귤 냄새가 남아 있던 식탁에서
나는 울었고,
조금은 내려놓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아빠에게, 외할머니에게,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을 건너온 나 자신에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기억해 줘서 고맙다고.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