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아빠는 사랑을 남기고 갔다
2년 전 오늘,
딸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이던 겨울방학이었다.
우리는 전라도로 여행을 떠났다. 전주에서 하루를 보내고, 여수에서의 둘째 날 아침.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조각공원에서 아이와 웃으며 사진을 찍던 참이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엄마의 목소리는 낮고 짧았다.
"할머니 방금 돌아가셨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이의 웃음소리가 퍼지던 공원이었다. 햇살은 여전히 그대로였는데, 그 빛이 갑자기 낯설어졌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무슨 정신으로 짐을 챙겼는지도 모른 채 가방을 닫았고, 그 길로 여덟 시간을 달려 밤이 되어서야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사흘 뒤, 발인식 날에는 비가 많이도 내렸다.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쏟아졌다. 강심제를 투여 중이라 외출이 허락되지 않았던 아빠는 끝내 할머니의 마지막 얼굴을 보지 못했다. 병원 침대 위에서 그 소식을 들었을 아빠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그날 내리던 비는, 아빠가 흘리지 못한 눈물 같았다.
발인이 끝난 뒤 곧장 병원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처음 장례를 치른 아이가 마음에 걸렸다. 검은 상복과 빈소의 울음소리, 낯선 장례식장의 풍경 속에서 아이는 유난히 말이 없었다. 그날은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나는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
삼일 동안 병실에서 홀로 계셨을 아빠를 위로하고 싶었다. 할머니 장례를 잘 치렀다고, 마지막 인사를 대신 전하고 싶었다.
그날이, 아빠와 내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가 되었다.
다음 날 아침이었다.
아빠는 엄마에게 오랜만에 잠을 푹 잔 것 같다고 했다. 보호자 침대가 불편하니 올라와 옆에 누우라고, 당신 곁이 더 편할 거라며 몇 번이나 말했다고 했다. 그러다 갑자기 집에 가서 좀 쉬고 오라고 했다. 엄마가 괜찮다고 해도, 아빠는 고집스럽게 다녀오라 했다.
맞은편 보호자 할머니가 웃으며 말했다고 했다.
"우리 할아버지는 그런 말 한 번도 안 하는데, 얼마나 다정하고 좋아."
그 말이 그렇게 따뜻했는데. 그 아침이 그렇게 평범했는데.
엄마는 성화를 이기지 못하고 병원을 나섰다. 집으로 들르기 전, 시장에 잠시 들렀다. 그리고 전화를 받았다. 아빠가 심정지 상태로 발견되었다는, 다급한 목소리였다. 심폐소생술을 하며 중환자실로 옮겼으니 빨리 돌아오라는 소식이었다.
그 순간, 아빠는 혼자였다.
나는 가끔 그날을 상상해 본다.
아빠가 마지막으로 본 풍경은 무엇이었을까. 그 순간, 정말 외로웠을까.
어쩌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남호야, 이제 그만 아프지 말고 나랑 같이 가자잉. 어여~"
꿈에서도 그리워하던 할머니가 아빠를 데리러 오셨을 것 같았다. 형제 많은 집의 장남으로 태어나 늘 사랑을 나눠야 했던 아빠는, 속으로는 사랑이 고팠을지도 모른다. 그날, 할머니가 손을 내밀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빠는 그 손을 잡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행복한 꿈이었다면, 깨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아빠는 그렇게 9일을 뇌사 상태로 계셨고, 끝내 하늘의 품으로 돌아가셨다.
시간은 흘렀지만, 할머니 발인식 다음 날 병원 침대에 기력 없이 앉아 계시던 아빠의 모습은 여전히 선명하다.
아빠는 마지막까지 엄마를 쉬게 해주고 싶어 했다. 그것이 아빠가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말보다 먼저 자리를 내어주는 사람. 당신이 힘든 날에도, 곁에 있는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
나는 효녀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빠가 살아 계실 때 그 사실을 잘 알면서도, 달라지지 못했다. 그 마음이 지금도 마음 한구석에 무겁게 남아 있다. 이유 없이 불쑥 찾아오는 기억들, 그리고 그 기억 속에서 마주하는 어린 나의 모습이 가끔은 낯설고 가끔은 미안하다.
그래서 쓴다.
내가 기억하는 아빠의 모습을 글 안에 녹여두고 싶었다. 충분히 사라지지 않을 무언가로 그려두고 싶었다. 그렇게 해두고 나서야, 나는 또 나만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빠.
행복한 꿈이었다면, 깨지 말고 그 안에서 오래 머무르세요.
할머니랑 천국에는 잘 적응하셨나요. 할머니 사랑, 마음껏 독차지하시고 아무 걱정 없이 편히 지내세요.
잘 가세요, 아빠.
나는 여기서, 당신이 남겨준 다정함을 붙들고 살아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