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가난은 기억 속의 붉은 멍이었다

아이에게 닿지 않기를 바라는 엄마의 시간

by 기록하는여자

나는 꽤 이른 나이에 깨달았다.
'돈이 없다'는 말은,
단순히 '가난'이라는 단어로는 다 담기지 않는다는 것을.

그건 곧,
도약할 발판조차 허락되지 않는 삶이라는 뜻이었다.

나의 청소년 시절은
단단하지 않은 모래성 위에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억지로 세우려 애쓰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흔들렸고,
불안했고,
붙잡을 것도 없던 날들이,
그냥 계속되었다.

그 밑바닥의 쓸쓸한 두려움은
직접 살아본 사람만이
조용히, 그리고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 나는 늘 걱정했다.
사는 집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불안,
쌀통에 쌀이 떨어졌던 몇 번의 기억.
학교에 도시락을 싸지 못했던 점심시간,
준비물 몇 천 원이 없어 모른 척했던 날들.

등록금을 제때 낼 수 없어
한 학기마다 조마조마했던 그 분기,
공과금 독촉장과 함께 날아든 고지서,
가구와 가전에 붙었던 빨간딱지들까지.

그 모든 것이
어린 내 마음 한 편을 묵직하게 짓눌렀다.

스무 살 생일까지 우리 집에 붙어 있었던
세 번의 '압류 스티커'는
내 마음에 붉은 멍 자국처럼 오래도록 남아 있다.

스물한 살.
아버지가 심근경색으로 쓰러지셨을 때,
나는 또 다른 시련 앞에 놓였다.

응급수술이 시급했지만,
지역 건강보험은 미납 상태였다.
병원에서 보험 적용을 받기 위해
나는 서둘러 미납 보험료를 일부 납부했고,
그제야 아버지는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실비보험 같은 건
가입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첫 직장에 들어가
직장건강보험에 가입하자마자,
몇 년간 쌓여 있던 친정의 미납 보험료 고지서가
고스란히 내게로 날아왔다.

결혼 후,
혼인신고를 하고 남편의 피부양자가 되었을 때도
변함없었다.

친정의 미납된 보험료는
꼭꼭 숨어 있다가도,
언제나 나를 따라왔다.

그 숫자들은 단순한 금액이 아니라
내가 감당해야 할 삶의 책임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가난과 돈을 배우게 되었다.

그건 단지 소비의 수단이 아니었다.
그건 생존의 도구였고,
삶의 무게를 버텨내기 위한 방패였다.

신혼 초,
처음 맡아본 가정경제는 낯설고 어려웠다.

절약을 하되,
그것이 궁상처럼 보이지 않기를 바랐다.

동정보다는 존중으로
내 삶을 바라봐 주길 바랐고,
그래서 더욱 스스로를 돌아보며
균형을 잡으려 애썼다.

그렇게 사는 동안
나는 돈이 들어오면 좀처럼 쉽게 쓰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인색이라 했지만,
나에게는 '기억'이었다.

돌아보면,
그 모든 선택의 기준엔
내가 지나온 시간들이 있었다.

밑바닥의 기억들,
그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오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아끼며 살아왔던 걸까.
왜 매 순간 그렇게 조심스럽게 살아야 했을까.

그건 아마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에게
이 무게가 닿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내 아이가 이 글을 읽게 된다면,
엄마가 왜 그렇게 살았는지를
조금은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

사랑만큼은
결코 아끼지 않았던 엄마로
기억되길 바라며.

그리고 무엇보다,
엄마가 견뎌낸 무게가
아이의 삶엔 닿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버텨낸 시간 위로
아이가 가볍게 뛰어오를 수 있기를.

불안보다,
희망이 먼저 깃드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그 마음이 언젠가
조용히 아이에게 닿기를.

가장 따뜻했던
엄마의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