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흘러가도 괜찮다는 걸, 아이에게 배웠다

물 위에서 배운 마음의 여백

by 기록하는여자

긴 연휴의 끝, 우리는 쉼을 목적으로 파주에 있는 풀빌라로 향했다.
여행이라기보다 잠시 멈춤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음식은 배달로 해결했고,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하루를 보내고 싶었다.
해야 할 일도, 가야 할 곳도 없는 그 여유가
지친 마음에 가장 필요한 선물 같았다.

햇살이 부서지는 오후, 아이와 수영장에 나란히 앉았다.
튜브 하나에 팔을 걸고 물 위에 몸을 맡겼다.
물결은 잔잔했고, 바람은 부드러웠다.
그 평화로운 순간에 문득, 너무 조용해서 괜히 묻고 싶어졌다.

"용용아, 요즘 고민 같은 거 있어?"

사춘기 아이의 속마음을 듣고 싶었다.
학교생활은 괜찮은지, 친구 관계는 어떤지.
괜히 물어보고 싶었다.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보려는 엄마의 습관 같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잠시 고개를 돌리더니 웃으며 말했다.
"고민? 난 그런 거 없는데.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사는 거지."

그 한마디가 물결처럼 내 마음에 스며들었다.
'흘러가는 대로 산다'는 말이 왜 그렇게 낯설게 들렸을까.
나는 늘 무언가를 계획하고,
앞서 걱정하며 살아왔다.
엄마로서, 아내로서, 딸로서.
삶을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
붙잡고, 관리하고, 애써왔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그건 되는 대로 막 사는 거야?"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아이는 물결에 발끝을 맡긴 채, 시선을 멀리 두고 대답했다.

"그런 건 아니고, 내가 정한 룰 안에서 흘러가는 거지."

그 말에 웃음이 났다.
'내가 정한 룰 안에서'라니.
어쩐지 아이의 세계가 나보다 단단해 보였다.
나는 아이를 '불안한 사춘기'로만 바라봤는데,
그 시간 속에서 아이는
자신의 중심을 세워가고 있었다.

그 말을 곱씹다 보니
내 마음속이 조금 조용해졌다.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조급해졌을까.
매일 아이를 돌보느라 정작 내 마음은 방치한 채,
무언가를 이루어야만 안심했던 것 같다.
흘러간다는 건 포기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걸
아이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

물 위로 비치는 햇살이 반짝였다.
그 빛에 아이의 얼굴이 비치자
나는 괜히 오래 바라보았다.
지금 이 순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도 좋았다.
이 평온이 오래 머물길 바랐다.

그러던 중, 아이가 불쑥 물었다.
"엄마는 차은우가 좋아? 변우석이 좋아?"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삶의 철학 같은 대화가 끝나자마자
이야기는 순식간에 예능 토크로 흘러갔다.
그게 우리 모녀의 리듬이었다.
진지했다가 웃고, 웃다가 다시 진지해지는
그런 관계.

물 위에서 아이는 나에게 인생의 방식을 가르쳐주었다.
붙잡지 않아도 괜찮고, 흘러가도 괜찮다고.
내가 잊고 있던 마음의 여백을
아이는 아무렇지 않게 건네주었다.


해야 할 일은 여전히 많지만,
가끔은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마음으로 하루를 흘려보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 느슨해도, 잠시 멈춰 서도 괜찮다.
삶도 결국, 흘러가는 대로 살아도 괜찮은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