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여전히 뜨겁다

내가 원했던 엄마, 내가 되고 싶은 엄마

by 기록하는여자

초등학교 1학년이던 어느 봄날.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집 안은 반짝반짝 윤이 났고, 공기마저 맑았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적막이 먼저 나를 반겼다.

그때는 그랬다.
하굣길이 참 길고, 무거운 시간이었다.
현관을 열고 들어오면 괜히 방문을 하나씩 열었다 닫고는 했다.
아무도 없는 그 조용한 집에서, 나를 기다리는 건 '텅 빈 공기'였다.

그 공기 속엔, 늘 부재중이던 엄마가 있었다.

어린 나는 몰랐다.
그 시간이 엄마에게도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고마운 틈이었다는 걸.
엄마는, 오빠와 내가 학교에 간 사이
잠시나마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오빠가 초등학교 4학년, 내가 입학을 하던 해였다.
두 아이가 함께 등교하는 모습을 보며
엄마는 조금은 안심하셨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집을 잠시 비워도 괜찮겠다는 마음.
그 믿음이, 엄마를 바깥으로 이끌었다.

집안을 정리하고, 에어로빅이나 수영 같은 운동을 다녀오셨다.
점심은 동네 친구들과 함께했고,
커피 한 잔의 여유로
비로소 '엄마'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시간을 보내셨다.

그리고 오후 다섯 시가 가까워지면
양손 가득 장을 봐와
분주한 저녁 준비로 다시 '엄마의 자리'로 돌아오셨다.

그때 나는 겨우 여덟 살.

그 쓸쓸함과 외로움,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막연한 두려움은
마음 깊은 곳에 조용히 숨었다.
표현할 줄 몰랐던 감정들이,
내 안에서 천천히 굳어갔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
내가 아이를 키우며 비로소 알게 되었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은 결국,
사랑받고 싶었던 내 마음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는 걸.

그래서 나는,
내 아이가 원할 때면 언제든 곁에 있어주고 싶었다.
엄마가 자리를 비운 그 시간만큼,
나는 아이의 옆자리를 지켜주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내가 원했던 엄마'가 되기 위해 애쓰며 살아왔다.

결혼 후 15년을 포항에서 살다가,
아이 초등학교 2학년 무렵 지금의 집으로 이사했다.
친정엄마와 차로 한 시간 남짓한 거리.
자연스레 엄마는 자주 오셨고,
나는 그게 조금.. 버거웠다.

그 감정은 어쩌면 미움이었고,
원망이었고,
어른이 된 나의 사춘기였는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왜,
내가 정말 엄마가 필요했을 때는 옆에 없었으면서,
이제 와서 자꾸 내 곁에 오려는 거예요?"

나는 엄마를 밀어내고,
마음을 닫았다.

그러다 작년 봄,
아빠가 돌아가셨다.

엄마는 홀로 남으셨고,
나는 그 허전함이 걱정되어
'미스터 트롯 2' 콘서트 티켓을 선물했다.
친구분과 함께 다녀오시라고.

그게 시작이었다.

엄마는 본격적인 덕질을 시작하셨다.
팬카페 활동, 콘서트, 방송 방청, 팬미팅,
그리고 일본 원정까지.

어릴 적에도 그러셨다.
무언가에 빠지면 끝을 보는 성향은 여전하셨다.
그 모습이 낯설지만은 않았다.
아니, 이제는 오히려 참 다행스러웠다.

요즘 나는,
스스로와 약속한 '한 달에 한 번, 엄마와의 데이트'를 실천 중이다.

이번 달엔 엄마가 좋아하시는 샤부샤부를 함께 먹고,
가수 안성훈 님의 신곡을 함께 들었다.
열정 가득한 팬 활동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오후 4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손엔 엄마가 챙겨주신 알타리 김치 한 통이 들려 있었다.

그렇게 흘러간 평범한 하루.
그 속에서,
오래 묵은 감정이 천천히 풀려갔다.

만약 엄마가 아빠를 떠나보내고
방 안에만 머무르셨다면,
나는 훨씬 많은 걱정 속에 살았을 것이다.

지금 엄마는 운동도 하시고, 친구들도 만나시고,
무언가에 진심으로 몰입해 살아가신다.
그 모습이 참 고맙다.

엄마는 여전히 뜨겁다.
삶을 향한 에너지,
좋아하는 것을 향한 몰입,
그리고 혼자서 살아내려는 단단한 의지가.

그 모든 것이
엄마가 나에게 주시는 깊고 넓은 사랑임을,
이제는 안다.

어릴 적,
엄마가 자식보다 자기 자신이 더 중요해 보일 때
나는 섭섭하고 외로웠다.

하지만 이제 생각해 보면,
그건 그저 어린 딸의 투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엄마가 즐겁고 바쁘게 살아가시니
나도 마음이 한결 놓인다.

그리고 나 역시 바란다.

언젠가 내 나이 일흔이 되었을 때,
덕질은 아니더라도
배우고, 나누고, 기록하며
나 자신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이고 싶다.

오늘 이 다짐을,
언젠가 내 아이도 마음으로 느껴주기를.

그날을 생각하며
오늘도 나는,
엄마를 쓰는 저녁을 차곡차곡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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