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성의 확대
“와! 합격이야! 합격!”
은영은 환호성을 질렀다.
몇 년만의 대학합격인가.
1998년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03학년도에 대학을 입학하게 되었으니 5년 만이었다.
“잘됐다. 축하해!” 합격자 발표날 분명 떨릴 테니 옆에 있어주겠다고 해서 만난 친구 수영이와 상희도 축하해 주었다.
“고마워. 그런데 어느 학교를 선택해야 하지?”
기쁨도 잠시, 은영은 고민이 되었다. 은영은 총 세 곳의 학교를 지원했는데 그중 두 곳에서 합격 통지를 받은 것이었다.
K대 실내건축학과와 L대 문예창작학과.
“하.... 고득점 학과인 실내건축학과를 가자니 적성에 안 맞고, 그렇다고 높은 점수를 받았는데 한참 점수가 남는 문예창작학과를 가기도 아깝고..”
“학교도 K대가 좋긴 하지. 그래도 네가 해야 될 일인데 평소 더 하고 싶었던 걸 선택하는 게 낫지 않아?” 고등학교 때부터 가장 가까운 친구인 수영이는 적성대로 선택하라는 의견을 내놨다. 입학 등록 마감시간은 이틀뒤. 이틀 동안 결정해야 하는데… 은영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실내건축학과를 가면 인테리어디자이너가 되는 거다. 열심히 배우면 공사 현장에서 사람들에게 디자인대로 만들어내라고 알려주는 일을 할 수 있겠지? 드라마에서 얼핏 봤어. 겨울연가에서 최지우 매력 있던데. 최지우 직업이 인테리어 디자이너였지? 은영은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세련되고 전문적인 느낌. 생각만 해도 멋있을 것 같아. 가만있어보자, 실내건축학과니까 남학생들도 많겠지? 은영이는 머리 굴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렸다.
‘아니야. 어렸을 때부터 글 쓰고 책 읽는 거 좋아했는데. 내가 즐겁게 잘 해낼 수 있는 일을 배우는 게 나을 거야.’
은영은 어렸을 때 기억을 떠올렸다.
“은영아, 우리 집 놀러 갈래?” 5학년이 되고 새로 사귄 친구 미정이가 말했다.
“오늘? 너네 집에 어떤 책 있어? “
은영이가 친구네 집에서 가장 궁금한 것은 책이었다.
“삼성출판사 세계 명작전집 있어.”
“너 다 읽었어?”
“아니, 책이 얼마나 많고 두꺼운데 무슨 수로 다 읽어?”
“나 놀러 가면 두 권만 빌려주라.”
“안돼. 새 책이라.”
“내 책받침 줄게. 새로 산 연필도 줄게.”
은영이는 얼른 책을 읽고 싶어서 새로 산 책받침과 연필을 미정이에게 주었었다.
생각에 잠겨있을 때 이번엔 상희가 말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더 전망이 좋지 않나?” 그래 전망, 전망도 중요해. 글쓰기는 혼자서 조금씩 해보면 되지 않을까?
은영이는 ‘전망’이라는 단어의 모호함을 그때는 깨닫지 못했다.
결국 은영은 실내 건축학과를 선택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전망”은 그 일을 할 수 있는지 아닌지 판단한 다음에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건축구조, 인체공학, 조명디자인, 설계, 재료학 등 대부분의 수업이 은영에겐 쉽지 않았다. 소묘나 드로잉 등 스케치 수업을 제외하면 흥미가 가지 않았고 조도계산은 너무 복잡하고 어려웠다. 벽지 마감선, 가구선, 벽체선 등 샤프심 두께(0.1,~2mm)를 이용해 도면에 정확하고 다르게 표기해야하는 것들이 왜이렇게 많은지. 도면을 그려야하는 트레싱지는 왜 자꾸만 찢어지는지. 아, 잘 찢어져서 날 슬프게 하는 트레싱지여. 은영은 탄식했다
은영은 겨우 졸업할 수 있었고 다행히 인테리어 회사에 취업했다. 하지만 그 일은 처음부터 맞지 않는 옷 같았다. 클라이언트를 상대하는 일은 그나마 견딜 만했다. 그러나 현장은 달랐다. 작업자들은 서로 편할 때 일하겠다고 다투었고, 제대로 시공하지 않아 수정 요청을 하면 잘 받아들이지 않았다.
“몰라서 그러는데, 그런 건 신경 안 써도 돼요.”
편한 대로만 하려는 태도 앞에서 은영은 자주 막막해졌다. 묵묵히 자기 몫을 해내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다.
매번 부딪히며 은영은 서서히 지쳐갔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살아야 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야…”
하지만 솔잎이 아니더라도,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며 살아가야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고 어느새 은영은 인테리어 업무 4년 차가 되었다.
“은영 대리! 이번 현장도 잘 빠졌더라. 수고했어.”
대표의 칭찬에 은영은 가볍게 미소 지었다.
이제 인테리어 일은 손에 익었고, 인정받는 즐거움도 있었다. 현장에 따라 밤을 꼬박 새우는 날도 많았지만, 도면 위에 그린 선이 실제 공간으로 태어나는 과정은 묘한 매력을 주었다.
실내건축을 공부하고, 또 현장에서 일하며 은영은 뼈저리게 깨달았다.
성향은 바뀔 수 있고, 길은 하나로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은영은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송충이는 한 가지 솔잎만 먹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