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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네 Mar 16. 2022

III. 시력과도 맞바꿀 수 없는
음악의 감각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 | 제3편

그는 푸른 하늘 가운데 군림하는 태양을 바라본다. 그리고 밤하늘 가운데 산 아래를 지켜보는 달과 그 중심으로 촘촘하게 수놓은 별들을 바라본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 삶을 살아간다. 고로 자연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몸 또한 자연의 영향을 받는다. 저 하늘의 눈부신 태양과 수많은 별과 달 또한 우리의 인체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게 틀림없다.


‘행성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 De planetarum influxu in corpus humanum’.

프란츠 안톤 메스머는 지구 주위에 돌고 있는 태양과 달, 그리고 반짝이는 별이 인체와 질병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광범위한 연구의 결과를 담아 한 편의 논문을 영원불멸한 라틴어의 제목과 함께 학계에 발표하였다. 일월성신을 관찰하여 미신을 자아낸 허술한 점성 의학술이 아니었다. 신비와 미신으로 가득 찬 불신의 유럽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과학의 중심지로 이룩시킨 마지막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 아이작 뉴턴 Isaac Newton이 하나님이 하사해주신 정신력을 발휘하여 밝혀낸 세상의 원리에 입각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연구의 결과였다.


 영국을 둘러싸고 있는 바다가 12시간 반마다 뭍에서 물러나기도 하며 뭍에서 가까이 다가오기도 하는 힘, 바로 뉴턴이 발견한 조석의 원리에 입각한 이 논문은 달과 별의 움직임에 의해 인체 내의 일어나는 특정한 조류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 논문이었다. 인체는 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태양과 달, 별을 움직이는 우주의 힘은 영국을 둘러싼 바다처럼 우리의 인체 내에도 똑같이 미쳐 특이한 조류를 형성시키고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동양에서는 이 보이지 않은 우주의 힘으로부터 기인한 인간의 힘을 ‘기’라고 일컫는 것처럼 메스머는 모든 생명이 소유하고 있는 이 우주의 힘에 ‘동물 자기 Animal magnetism’라는 이름을 붙여 자신의 의술에 적용시켰다. 즉, 인간, 동물, 식물과 같은 모든 생명체에는 우주의 힘으로 생성된 일종의 유체가 존재하며 메스머는 이 힘을 잘 사용한다면 본디 내재되어있는 치유의 힘을 발현시켜 모든 생명체의 치료에 적용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훗날 파리로 도주하게 될 메스머는 이 독특한 치료법을 인정받고자 프랑스 왕립 의학 학회에서 과학적인 조사 의뢰를 요청하였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메스머가 주장하는 '동물 자기'는 존재하지 않는 힘이라고 결론을 지었고 메스머를 결국 사기꾼이라는 오명과 함께 파리에서 추방되는 결과를 불러왔다. 하지만 이미 전 유럽에서 그를 많이 따르는 추방자들과 메스머를 존경하는 열정적인 제자들 덕분에 파리에서 사기라고 판명난 그의 이론은 시대에 사장되지 않은 채 21세기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게 되었다. 메스머리즘 Mesmerism이라고도 불리는 '최면술 Hypnotism'이라는 이름으로.



메스머의 동물 자기 요법을 그린 작품. 맨 오른쪽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여성이 폰 파라디스라고 추측한다. ⓒ Wellcome Library, London. Wellcome Imag


마리아 테레지아  파라디스는 다시 한번 세상을  눈에 담기 위해 프란츠 안톤 메스머를 만나 본격적으로  유럽을 들썩인 최신 진료 받기 시작하였다. 안락한 의자에 앉은  파라디스는 메스머의 인도로 심연의 세계를 떠날 준비를 마치고 그의 지시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진료가 시작된 후 얼마 되지 않아 메스머에게서   없는 신비한 힘이, 진료 전 미리 설치한 폰 파라디스의 눈 주위의 파이프와 로프를 통해 조심스럽게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몸은 점점  바닷속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점점 심연으로 무겁게 가라앉으며 모든 감각이 차단되기 시작했다. 모든 감각이 차단된 폰 파라디스는 메스머의 지시에 따라 심연 깊숙이 위치한 자신의 갈망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인생에서 세상을  눈에 온전히 담은 날보다 세상을 담아낼  없던 날이 허다한 폰 파라디스에게 ‘시각’이라는 새로운 감각은 세상 어느 무엇보다   희망과 호기심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변화는 시작되었다. 


메스머의 동물 자기 요법으로 자기 암시에 빠진  파라디스는 나날이 지날수록 자신의 눈에 무언가비치는 것을 확인하였다. 고개를 올리면 사람들이 눈이 시리게 푸르다고 극찬하는, ‘하늘이라는 거대한 공간에   없는 무언가가 끊임없이 흘러가는 형상이 언듯 보이기 시작했다. 저것이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구름이라는 것일까. 랫동안 하늘을 지켜본 자신의 호기심 많은  눈을 겨우 내리고 잠시 고개를 옆으로 려보았다. 평소엔 피부로 느끼고 귀로 느꼈던 산들거리는 ‘바람’에 몸을 맡겨 흔들리는 각양각색의 점들 형태가 언뜻 눈에 맺혔다. 평소 흙내음과 꽃향기가 진동하는 정원을 산책한  파라디스는  점들의 형태가 바로 사람들이 매일 정성스럽게  손으로 물을 흠뻑 적시며 상큼하고 달콤한 향기를 퍼트리게 만드는 ‘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기억에는 없지만 어린 시절에 잠깐의 만남 후 영원한 이별을 고했던 세상의 모습이 다시 한번 자신에게 두 팔을 들고 맞이하고 었다.


하지만 아름다움으로 가득  세상을 시각이라는 새로운 감각으로 다시 만나는 것도 잠시,  파라디스는 이윽고 자신의 몸에 다가온  변화에 당혹을 감추지 못했다. 세상을 시각으로 인지하는 비중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자신의 세상이나 다름없었던 음악의 감각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흘러 영원한 어둠으로 빨려 드는 듯했다. 자신의 두 손 위에서 우아하게 춤을 추던 음악이 아무 대책도 없이 스르빠지고 있는 걸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움켜쥘  없었다. 세상을 하나하나 눈에 새겨 넣는 즐거움은 자신에게 새로운 예술적 상상과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지만 자신의 인생과 함께한 음악감각이 주는 상상과 영감 아래에선 한낱 겨자씨보다도 작은 영감일 뿐이었다.  파라디스는 기만의 세상각양각색의 색상으로 장식해 준 오색찬란한 빛깔들을  이상   없었다. 자신의 눈은 점점 빛을 찾아가며 새로운 세상을 담기 시작했지만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온 세상은 점점 퇴색하여 흑백의 영역으로 잠겨가고 있었다.


최초로 인생 전반이 흔들리는 절망을 맛본 마리아 테레지아  파라디스는 18세가 되던 어느 초가을, 그렇게 자신의 세상을 지키기 위해 메스머의 치료를 거부하게 되었다.

 



자신만의 세상이 수만 개의 파편으로 조각나는 고통을 경험한  파라디스는 충격에서 벗어나 서서히 자신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들이 교차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사람들이 자신의 곁에서 아름다운 언어로 묘사해준 다양한 빛깔의 세상을 미약하지만 두 눈에 머금을 수 있었던 희미한 시력이 다시 형태를 구분할  없는 흑백의 세계로 변화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시력이 다시 어둠에 잠길수록 손가락 사이로 흩어져버린 음악의 파편들다시 켜켜이 자신에게로 돌아와 서로 재조립되며 자신의 마음속을 서서히 여러 빛깔로 채우기 시작했다. 분리된 음이 다시 조립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폰 파라디스는 혹여 또다시 잃어버릴까 탄생과 소멸을 반복하는 음의 파편들을 소중하게 하나하나 음미하기 시작하였다. 


머릿속에 다시 한번 서서히 채워지는 음의 파편들. 그 파편들이 서로 조립되며 각양각색으로 뻗어나가는 아름다운 멜로디들. 집 밖을 나갔다가 겨우 돌아온 연약하고 애처로운 카나리아 같은 이 음악의 파편들을 다시는 잃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잊고 싶지 않았다. 이후 폰 파라디스의 심연에는 새로운 열망이 자라나게 되었다. 자신의 머릿속에 끊임없이 솟구쳐 흐르는 일렬의 멜로디들을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하고 싶은 열망. 자신만의 세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이 음악들을 손에 잡을 수 있는 악보로 기록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자신의 음악을 악보로 기록하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유년 시절부터 자신의 멘토이자 스승인 안토니오 살리에리에게 작곡에 대한 모든 기초를 배웠기 때문에 작곡은 누구보다도 자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악보로 옮겨 적을 수 있을까. 음악이라는 학문에서 필수불가결적인 악보라는 그 종이 한 장조차 제대로 볼 수 없는 자신인데 하물며 오선지의 가느다란 오선 사이에 세밀한 음표조차 새기는 것은 더욱더 불가능하지 않은가. 음악의 감각이 만들어내는 음들은 순간의 불꽃을 터트리며 탄생과 소멸을 반복하는데 나는 이 음들을 재빠르게 잡아 기록할 수 있을까. 나는 작곡을 할 수 있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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