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 | 제4편
한편, 절망이라는 심해에서 서서히 떠올라 빛 위로 올라온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는 그 일렬의 끔찍한 사건을 겪기 전부터 자신의 음악을 펼쳐 나간 비엔나의 살롱에 서서히 얼굴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살롱에 열 손가락으로 마법을 펼치는 특별한 피아니스트의 음악 소리가 다시 한번 가득 차길 바라던 귀족들과 부르주아지들은 두 팔 벌려 그를 환영하였다. 귀족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살롱의 중앙에 마련된 피아노에 앉은 폰 파라디스는 호흡을 가다듬고 자신만의 세상에 존재하는 음악의 감각을 들여다보았다. 화려한 빛깔의 그 감각은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지어주었다. 준비는 끝났다. 조심스러운 터치로 피아노의 건반을 눌러 연주를 시작하였다. 처음으로 연주한 곡은 지금 한창 파리를 중심으로 유럽을 한창 돌고 있을 자신의 벗, 모차르트가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부터 연주하였다. 유년 시절, 모차르트 자신이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작곡했다고 자랑하며 피아노 앞에서 연주한 피아노 소나타를 떠올리며. 자신의 벗이 작곡한 작품 이외에도 다양한 거장들의 음악을 연주하던 그는 살짝 노선을 바꾸어 자신이 평소에 음미하던 음악의 파편들을 모아 즉석에서 연주를 이어갔다. 아, 나도 내 작품을 악보로 남길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연주가 끝나고 귀족들과 사교 활동을 이어가는 와중, 폰 파라디스는 자신의 예민한 귀로 불편한 발걸음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한 사람과 그를 부축하는 또 다른 사람의 소리를 포착하였다. 자신 앞에 다가온 불편한 발걸음을 가진 그 사람은 폰 파라디스에게 형식적인 인사를 마친 뒤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네었다. 방금 전 자신의 손으로 연주한 아름다운 음악에 대한 감사 인사라고 생각한 폰 파라디스는 평소처럼 우아한 목소리로 답하였지만, 감사인사를 전한 그 여성은 폰 파라디스가 예상하지 못한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여성도 전혀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한 것이다. 이 장애로 인생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채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한 이 여성은 자신의 삶이 의미 없는 삶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과 같은 시각장애인이 열 손가락과 목소리로 음악이라는 마술을 자유자재로 부린다는 이야기를 주위에서 듣게 되었고 오늘 이 음악회에서 사실임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는 희망이라는 등불이 되어 자신의 어두운 인생을 밝혀주었다. 모든 이야기를 마치고 거듭 감사하다는 인사를 한 그 여성은 그 먼 곳에서 찾아온 보람이 있었다는 말도 함께 곁들어서 말했다. 그 먼 곳이라니? 호기심의 미소를 보인 폰 파라디스의 표정을 읽은 동행인 여성이 답해주었다. 프랑스 파리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그렇게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는 어두운 삶을 살아가는 시각장애인들의 희망이자 롤모델, 그리고 우상이 되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어둠을 밝혀준 이 여성에게 열렬한 지지와 감사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하나 둘 보내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보낸 편지는 폰 파라디스의 앞으로 매일마다 한 다발의 편지들이 도착하기 일쑤였고 자신의 시녀들은 항상 그의 옆에서 정성스럽게 한 장씩 읽어주는 것이 어느 순간 그의 하루 일과가 되었다. 또한 매번 드나들었던 귀족들의 고풍스러운 살롱들은 이 기적의 여성을 잠깐이라도 보기 위해 항상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비엔나의 유서 깊은 극장에서 열리는 연주회는 항상 만석이 되어 폰 파라디스가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거대한 갈채와 우렁찬 환호성을 받으며 막을 내리게 되었다.
눈이 보이지 않음에도 큰 성공을 거둔 폰 파라디스는 사람들의 환호와 응원 속에 그저 묵묵히 비엔나의 살롱과 극장을 넘나들며 자신의 음악 세계를 선사해주며 인간 승리와 희망을 군중들에게 전달하였다. 청중들은 이 기적의 여성이 더 많은 무대로 올라오기를 기대하였고 이제는 오스트리아를 넘어 주변의 나라까지 그가 방문해주기를 하나같이 기다리기 시작하였다. 때마침 파리와 그 주변 국가를 여행하고 빈으로 온 모차르트는 폰 파라디스의 초대에 응해, 그의 살롱에서 여행에서 경험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폰 파라디스에게 하나하나 이야기로 풀어주기 시작했다.
한 잔의 차와 함께 이제 막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려나가기 시작한 자신의 벗은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잘츠부르크에서 아우크스부르크, 만하임을 거쳐 파리로 도착해 곧 뜨거운 사랑에 빠진 이야기. 베르사유 궁전에서 자신에게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을 제의를 받았지만 프랑스 특유의 엄격한 예법이 담긴 편지에 우스꽝스러움을 느끼며 이내 거절한 이야기. 무거운 가발 속에 땀이 저절로 차오르는 무더운 여름날, 온몸이 얼어붙는듯한 충격을 받고 이내 오선지 위에 펜을 들었다는 이야기. 어머니의 죽음. 그 충격에 단번에 작곡했다는 작품을 언급하며 모차르트는 피아노 앞으로 다가가 연주하기 시작했다. 다급한 말발굽 소리와 달리는 마차를 닮은 이 피아노 소나타를 감상한 폰 파라디스는 친구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한 편 그의 작품에 감탄을 마지않을 수 없었다. 자신은 말이라는 생물을, 그리고 마차라는 것을 볼 수는 없었지만 말이 달릴 때 말굽에서 전달되는 거대한 땅의 진동과 마차 바퀴의 덜컹거리며 위태롭게 달리는 소리가 생생하게 음악으로 전달되었던 것이다. 그는 그가 오감으로 느낀 세계를 음악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자신은 시각이 없는 자신만의 세계를 음악으로 표현해 사람들에게 전달해주고 싶었다.
연주를 마친 모차르트는 다시 폰 파라디스에게 다가와 다시 활기찬 목소리로 남은 이야기를 하나하나 풀어주기 시작했다. 몸소 경험한 그 시간들을 마치 추억하며 그리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마친 그는 어렸을 때부터 너무 많은 곳을 돌아다녀 이제는 아내와 함께 빈에 정착해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의 악보와 음악을 탐구하며 살아갈 것이라고 맑은 햇살처럼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모차르트는 자신의 보이지 않는 소중한 벗에게 이야기를 덧붙였다. 파리부터 인근의 모든 도시까지, 기적을 펼치는 그대를 사람들이 화두로 삼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그들은 기적의 눈먼 피아니스트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고.
그러나 이미 많은 이들이 편지로, 그리고 입으로 전해준 이 이야기를 수없이 들은 폰 파라디스는 음악적 영감을 서로 나누는 소중한 친구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뗬다. 이미 여행을 준비 중이라는 이야기와 함께.
한창 유럽 여행을 준비하는 어느 날이었다. 폰 파라디스는 이미 가장 가까운 잘츠부르크의 몇몇 극장 감독들과 선약한 연주회의 프로그램을 어떻게 구성해야 할지 깊은 고민에 빠져있었다. 한창 빈에서 자리를 잡아가는 소중한 친구의 작품, 비엔나의 아름다운 음악을 전도하기 위해 궁정의 음악가들이 고뇌하며 전심을 다해 작곡한 혁신적인 레퍼토리들. 그리고 자신이 평소에 조금씩 머릿속에서 작곡한 레퍼토리까지. 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아름다운 음악들이 너무나 많아 선택을 못하는 이 여성은 돌연 허겁지겁 누군가가 다급하게 달려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이 발소리는 요한 리딩거 Johann Riedinger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자신 앞에 당도해 숨을 고르는 리딩거는 이내 폰 파라디스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이 여성은 리딩거가 내민 물건을 손으로 더듬어 만져보기 시작했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촉감에 납작한 이 물건은 분명 나무판자인데 특이한 점이 있다면 바로 일렬로 나열된 구멍이 즐비하였다는 것이다. 리딩거가 건네준 판자를 한창 만져본 파라디스는 자신의 표정을 볼 순 없지만 아마 의아해하는 표정을 짓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요한 리딩거는 말했다. 이 나무판자는 그대만의 악보라고.
폰 파라디스의 든든한 친구이자 각본가인 요한 리딩거는 이전부터 지켜보았다. 눈이 보이지 않는 이 여성의 연주회에서 그가 머릿속에서 춤추는 멜로디를 손 끝에서 피아노 건반으로 흩뿌리는 순간 공간을 울리는 아름다운 음악들에 푹 빠진 군중들의 모습들을. 마치 부서지는 별빛이 그들을 현혹하는 것처럼, 그의 음악에 푹 빠지는 청중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 별빛들이 단 한 번으로 부서지는 것이 아닌, 악보라는 병에 고스란히 보관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 여성은 악보를 적을 수 있는 시력이 없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리딩거는 오랜 시간을 통해 고민하는 와중 어느 날 문득 폰 파라디스가 자기 앞에 놓인 차를 마시기 위해 테이블을 더듬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순간 깨달았다. 이 여성은 두 눈을 대신하여 촉각을 이용한다는 것을.
그렇게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만을 위한 '작곡판'이 완성되었다. 넙적한 나무판자에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을 뚫은 후, 각 음표마다 다른 머리 모양의 못을 준비하여 폰 파라디스가 직접 그 구멍에 못을 넣을 수 있게 고안한 판이었다. 멜로디는 폰 파라디스가 차차 핀의 높낮이를 이용하여 또 다른 규칙을 스스로 만들어도 되고, 정 안된다면 필사가인 자신과 의논하여 함께 규칙을 보충해 나가면 될 것이다. 아직은 고안할게 많은 작곡판이지만 적어도 눈이 보이지 않는 이 여성이 처음으로 자신의 손으로 직접 '작곡'이라는 영역에 뛰어들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요한 리딩거가 고안한 이 '작곡판'의 이야기를 들을 폰 파라디스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앞으로 자신이 그토록 염원했던 작곡을 할 수 있다는 벅찬 마음에 눈물을 흘렸을까, 아니면 드디어 밤하늘의 별빛같이 새벽녘의 햇빛에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자신의 음악을 영원히 박제시킬 수 있다는 기쁨에 환한 미소를 지었을까. 흥분한 마음을 가다듬은 폰 파라디스는 눈이 보이지 않은 대신 두 손으로 직접 작곡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 자신의 친구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이제 준비는 되었다. 작곡판과 자신의 두 손으로 자신만의 음악을 당당하게 발표할 수 있게 된 폰 파라디스는 자신의 고향인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너머에 위치한, 자신의 벗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로 향하기로 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