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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네 Mar 29. 2022

VI.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새로운 삶의 목적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 | 제6편

발랑탱 아우이 Valentin Haüy는 다 같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으로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시각 장애인들을 바라보면 항상 마음이 미어지고 짓눌리는 고통을 느꼈다.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이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많은 날을 지새우며 고뇌하였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이들이 새로운 시각을 가져야 했다. 비록 눈은 안 보이지만 그 또한 자신을 괴롭히는 저 군중들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교육.


그가 고민의 끝에 다다른 결과는 바로 교육이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이 가여운 사람들에게 더 시급한 것은 바로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돈도 아닌 바로 자신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 진리로 세상을 바꾸어나갈 수 있는 힘, 바로 ‘무지’에서 ‘지성’으로 향하게 도와주는 ‘교육’이 바로 그 해답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가 파리에 당도하고 얼마 되지 않아 생 제르맹 데 프레 지구에서 만난 거지 아이, 프랑수아 르쥐에르 François Lesueur 에게도 가장 필요한 것은 교육이었다. 그 어린 나이에도 눈이 안 보인다는 이유로 핍박받았던 그 아이를 거둬 자신의 제자로 삼은 발랑탱 아우이는 본격적인 공부를 하기 전 알아야 할 필수적인 재료, 글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영특한 자신의 제자는 아우이의 가르침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머릿속으로 빨아들였고 금세 문장을 만들 정도로 급발전하였다. 아우이는 르쥐에르를 가르치면 가르칠수록 시각 장애인들의 미래에 한 줄기 빛이 스며드는 것을 바라볼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한 가지 문제점이 빛 속에서 그림자를 드리우게 되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이 아이에게 어떻게 글자를 가르쳐야 하는 건가. 글은 말로 배우는 것과 직접 써보는 것 사이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데 말이다. 그래서 아우이는 이 고민을 해결해줄 사람으로 폰 파라디스를 지목하였고 오늘 이 자리에 조언을 구하기 위해 방문한 것이었다. 폰 파라디스는 아우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의 인품과 고귀한 삶의 목적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와 동시에 시각 장애인들을 향한 박애가 가득한 이 신사를 도와줄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폰 파라디스는 시각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글자를 알고 또한 쓸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는 여제가 그의 대모로 오해받을 정도로 가까워질 수 있었던 높은 신분, 그리고 음악이라는 축복 같은 큰 재능 덕에 일찍부터 글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폰 파라디스는 눈이 보이지 않았을 뿐 배움은 평등하다고 생각하기에 당당하게 자신만의 글을 배우는 방법을 개발하여 자신과 같이 눈이 보이지 않는 벗들과 함께 글을 배우고 문장을 만들어 편지를 나누고는 했었다. 아우이가 겪고 있는 그 고뇌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폰 파라디스는 자신을 찾아온 이 남성에게 감격에 가득 찬 목소리로 희망의 답을 전하였다. 다음에 정식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 (ⓒ Georg Hamann Privatarchiv)와 발랑탱 아우이


며칠 후 아우이의 저택에 도착한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는 발랑탱 아우이의 앞에서 무언가를 꺼내보였다. 바로 양피지였다. 겉으로 보기엔 자신의 저택 곳곳에서 흔히 굴러다니는 평범한 양피지였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손을 많이 타서 그런지 일정 간격으로 손때에 의해 검게 길들여져 있는 것이었다. 앞에 앉아있는 이 여성이 저 일정한 부분만 만져 검게 길들여진 이유를 아우이는 이윽고 깨닫게 되었다. 폰 파라디스가 건넨 이 양피지에는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필시 그 새겨져 있는 것을 손 끝으로 수시로 만졌기에 저처럼 일정한 부분만 양피지가 길들여졌을 것이다. 폰 파라디스가 건넨 양피지를 받은 아우이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손 끝으로 조심히 그 선을 따라가 보았다. A... 알파벳? 그랬다, 이 양피지에는 A부터 Z까지 알파벳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폰 파라디스는 어릴 때부터 세밀한 손 끝으로 이 양각을 따라 더듬거리며 알파벳을 배운 것이다.


오랜 세월로 인해 주름이 가득한 양피지에서 발랑탱 아우이는 새롭게 눈이 뜨였다. 이들은 촉각을 시각으로 대신한다는 것을 말이다. 폰 파라디스가 만든 이 손가락의 언어를 이용하면 자신의 제자, 르쥐에르는 알파벳을 배우고 단어를 배우고 문장을 만들 뿐만 아니라 글을 읽을 수도 있으며 훗날 양각 인쇄로 만들어진 책도 읽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아우이의 마음은 불꽃같은 사명감으로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어느 날 교회 중앙의 십자가를 통해 내려다보는 예수의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눈이 보이지 않는 안타까운 당신들의 자녀들을 평생 도우며 살겠다고 맹세한 그 약속을 드디어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아우이는 즉시 이들을 위한 새로운 교육의 장을 세우기 위해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는 파리 곳곳에서 약조된 연주회 준비로 인해 바쁜 일정을 지내는 와중에도 뜨거운 사명감으로 계획에 임하는 아우이를 찾아와 적극적으로 시각 장애인들을 위한 새로운 교육 시스템들을 함께 준비하였다. 새로운 교육 시스템을 만들어 나갈 때는 자신의 시각장애인 친구, 요한 루드비히 바이센부르크 Johann-Ludwig Weissenburg의 도움을 받을 때도 있었다. 바이에른의 선제후였던 카를 테오도르 Karl-Theodor의 밑에서 일하는 자신의 친구는 독일 바이에른의 맹인 아이들을 배움의 길로 인도하는 교육자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맹인 아이들에 뜨거운 박애를 실천하는 아우이, 그리고 자신의 편지 친구이며 교육자인 바이센부르크와 함께 새로운 교육의 장을 만들기 위한 사명감 속에서 새로운 경험을 쌓아가는 폰 파라디스는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이 모든 경험이 자신의 삶에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가장 차가운 바람이 온몸을 휘감는 1785년 2월, 드디어 발랑탱 아우이는 프랑스 파리 최초로 눈이 보이지 않는 특별한 학생들을 위한 학교가 문을 열었다. '시각 장애 청소년 연구소 Institution des jeunes aveugles' 라고 불리는 이 학교는 눈이 보이지 않아도 일반인들과 똑같은 배움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낙원 같은 곳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는 바쁜 음악 여행의 일정으로 작년에 이미 파리를 떠났기에 그 자리에서 함께 축하해 줄 순 없었지만 분명 자신과 함께였다면 진심으로 기뻐해 주었을 것이라 아우이는 생각하였다. 훗날 이 연구소는 루이 16세의 지원을 받아 '왕립 시각 장애 아동 연구소'로 격상하여 눈이 보이지 않는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어른이 되어도 스스로 일어설 수 있게 방직과 같은 손으로 할 수 있는 직업 훈련을 동시에 시행하여 눈이 보이지 않아도 자신의 인생을 영위할 수 있는 중요한 기관이 되었다.


세기가 바뀐 1819년, 이 학교에 입학한 그 학생에게도 이 연구소는 낙원 같은 곳이었다. 비록 풍족하지 않은 재정임에도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안정적인 환경을 제공하는 이 학교의 입학생이 된 그는 이윽고 이 학교의 설립자인 발랑탱 아우이에게 반기를 들게 된다. '눈의 언어를 이용하여 손가락으로 대화'하는 아우이의 돋음 문자 시스템에 큰 불편을 느낀 이 학생은 보이지 않는 눈으로 자신의 모든 삶을 걸고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새로운 손가락의 언어를 찾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노력은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어느 육군 포병 장교가 두 개의 열에 최대 12개의 점을 사용해 만든 야간 문자를 자신의 학교에 소개하였음을 알아내었고 그는 그 즉시 이 야간 문자를 입수하여 다시 한번 새롭게 재창조하기 시작하였다. 12개의 점은 6개로 대폭 줄여 그 전에는 손 끝으로 더듬어 읽었던 이 문자를 한 번의 터치로 바로 읽을 수 있는 편리한 문자로 탄생하였다. 시각 장애인들이 보다 쉽게 글을 배울 수 있는 이 시스템을 만든 15살의 소년, 그가 바로 루이 브라이 Louis Braille, 바로 오늘날의 점자 시스템을 구축한 인물이었다.




세 누이와 함께 첼로를 연주하는 웨일스 공 프레데릭


1784년 11월, 발랑탱 아우이가 시각장애 아동들을 위한 학교를 짓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이, 차가운 바닷바람과 함께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는 활기찬 바다 풍광과 짭짤한 공기가 가득한 영국의 한 항구에 도달하게 되었다. 영국인들은 항구에 도착한 폰 파라디스 일행을 성대하게 맞이해주었다. 그중 특히 영국의 선왕이었던 조지 2세의 맏아들이자 지금의 영국을 통치하는 조지 3세의 아버지인 웨일스 공 프레데릭 Frederick, Prince of Wales은 이 여성이 자신의 자랑스러운 조국에 발을 딛는 것만을 기다린 마냥 그 누구보다도 성대하게 그들을 맞이해주었다. 평소 첼리스트이자 자신의 고귀한 신분으로 영국의 예술가들을 위해 아낌없이 후원한 웨일스 공은 오스트리아를 넘어 그 난공불락의 파리의 음악계를 선도한, 이 눈먼 피아니스트를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꼭 환대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와 함께 온 일행 들는 웨일스 공의 환대와 아낌없는 배려 속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웨스트민스터를 여행하며 여독과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사원과 법원들이 즐비한 런던의 중심인 웨스트민스터를 여행하는 중 평소 웨일스 공이 가장 많은 공을 들이며 유럽에서 가장 완벽한 건축물로 탈바꿈하기 위해 수시로 손을 대고 있는 칼튼 하우스 Carlton House 앞에 도착하였을 때 웨일스 공은 이 아름다운 건물 안에서 그대의 음악이 흘러나올 날을 맞이하고 싶다는 말을 건네었으며 폰 파라디스는 그의 명령에 부응하였다.


며칠 동안 푹 쉬며 다시 한번 자신만의 세상에서 활기를 띄기 시작한 음악과 함께 완벽한 준비를 마친 폰 파라디스는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다시 한번 시작하였다. 그 시작은 웨일스 공의 자랑인 칼튼 하우스였다. '그는 마치 눈이 먼 마술사와 같다.' 영국의 저명한 언론사, 런던 타임스에서는 폰 파라디스의 연주회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심지어 웨일스 공의 아들이기도 한 조지 3세와 대면한 폰 파라디스는 어렵게 자신에게 찾아온 위대한 영국의 왕 앞에서 기적의 연주를 선사하기도 하였다. 그가 선택한 레퍼토리는 비록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영국의 제2의 고향으로 삼으며 활동한 위대한 영국의 작곡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Georg Friedrich Händel이 작곡한 푸가들이었다. 훌륭한 안목을 가진 폰 파라디스의 큐레이팅과 눈이 보이지 않음에도 그 누구보다 완벽하게 펼친 기적의 연주는 조지 3세의 마음에 큰 감동으로 밀려들어왔다.


비록 파리만큼의 호응은 없었지만 연주회에 참여한 청중들은 물론, 같은 아픔을 지닌 시각장애인들까지 큰 감동을 선사해준 폰 파라디스는 며칠 후 웨일스 공이 연주하는 첼로와 함께할 레퍼토리를 선곡하다 문득 차가워진 방 안의 공기를 느끼며 잠시 작업을 멈추었다. 방 안의 공기는 난로로 따뜻했지만 11월의 공기와 다르게 코 끝이 더 시린 냉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지금쯤 파리의 아이들을 위한 학교는 잘 지어지고 있을까. 참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은 지금까지 음악 속에서 살아왔으며 사교계의 여러 사람들과 친목을 다졌지만 결국 그들과 이루고 싶었던 최종 목적은 역시 앙상블 및 연극과 같은 다양한 예술 활동일 정도로 그의 삶은 음악으로 가득하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신과 신분도 전혀 다르고 자신의 삶과 연관성도 없지만 자신과 같은 처지인 시각 장애 아이들이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프랑스는 이제 발랑탱 아우이라는 존재로 시각 장애 아이들이 더 성장할 수 있는 배움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그럼 오스트리아는? 깊은 생각이 여기까지 도달한 순간, 문을 살짝 두드리는 소리에 폰 파라디스는 생각을 멈추었다. 들어온 사람은 바로 함께 여행을 도와주고 있는 요한 리딩거였다. 그는 폰 파라디스의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었다. 리딩거가 쥐어준 물건을 손으로 더듬어 만져본 폰 파라디스는 금세 이 물건이 편지임을 알아차렸다. 누구에게서 온 편지일까. 리딩거는 호기심으로 가득 찬 폰 파라디스의 의중을 헤아리고는 그의 호기심을 해결할 답을 들려주었다.


나의 벗이여, 그 편지는 모차르트가 보내온 것이라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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