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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네 Apr 07. 2022

VII. 모차르트가 헌정한
피아노 협주곡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 | 제7편

살포시 베일 속에 숨겨진 음악의 본질을 유일하게 같이 들여다볼 수 있는 음악 친구가 보낸 편지.


자신의 소중한 음악 동료, 모차르트가 보낸 편지에는 두터운 한 권의 책이 동봉되어 있었다. 항상 폰 파라디스를 지지해주는 그의 음악 동료는 무엇을 위해 정성스럽게 철하여 만든 책을 보내준 걸까. 책을 집어 든 폰 파라디스는 무작위로 한 페이지를 펼쳐 펜으로 눌린 희미한 자국을 따라 손 끝으로 세밀하게 더듬으며 읽기 시작하였다. 신기하게도 이 책은 여느 책처럼 빼곡하게 페이지들을 수놓은 글자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곧게 이어진 5개의 선, 그리고 그 선들 사이로 빼곡하게 채워진 수많은 기호들과 역동적인 그들만의 유려한 동선. 폰 파라디스는 이 책의 내용이 뭔지 깨닫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는 오선에 기록된 각 악기들의 목소리를 담아낸 악보였던 것이다. 리딩거는 보통 사람이면 아무리 손으로 더듬어도 알 수 없는 희미한 펜 자국을 따라 그 책을 파악하는 폰 파라디스를 향해 짧게 적힌 편지를 읽어주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에게 헌정.


평소라면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귀중한 일인 듯 정성스럽게 편지 내용으로 가득 적었던 가볍고 유쾌한 친구가 보낸 단 한 줄의 내용을 들은 폰 파라디스는 뜻밖의 귀중한 선물로 자신의 심장이 크게 울리며 숨이 막힐 정도로 격한 기쁨에 사로잡혔다. 지금까지 받은 어떤 선물보다도 값지고 귀한 선물. 나의 음악의 벗이 자신을 위해 작곡한 피아노 작품. 분명 모차르트 특유의 명랑하고 쾌활한 성격이 더해졌을 테지. 그리고 이번에도 세간에서 깜짝 놀라게 할 거침없는 음악적 혁신이 가득 담긴 피아노 작품이지 않을까. 나를 위한 음악이라면 분명히 단조가 아닌 온화한 장조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또 곡의 구성은 어떻고. 같은 음악 동료가 바라보는 나의 이미지는 어떨까. 폰 파라디스는 이 모든 궁금증을 안고 요한 리딩거에게 런던에서 사귄 음악 동료들을 불러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윽고 모차르트의 신작 협주곡이라는 이야기에 궁금증을 가득 안고 찾아온 모두와 함께 폰 파라디스는 초견 작업을 하기 시작하였다.





나뭇잎 사이로 눈부시게 비치는 햇살 같은 멜로디가 새로운 세계를 향해 한 발 한 발 내딛는 듯 현악기의 보드랍고 조심스러운 소리로 곡의 시작을 알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내디딘 발걸음이 자신감을 얻은 듯, 사랑스러운 현악 연주 위에 관악기가 힘차게 등장하여 어두운 숲 속을 성큼성큼 걸어 나가기 시작한다. 어두운 숲을 걷다 갑작스러운 햇살에 눈부시게 빛나는 아름다운 광경이 눈에 시리게 들어온다. 어두운 숲에서 빠져나온 그곳은 광활한 초원이었다.


오케스트라 전체가 아름다운 초원 위를 달리는 갑작스러운 봄바람처럼 이 곡의 제1주제를 시원하게 일으켜 연주하기 시작한다. 5월의 푸르고 싱그러운 초원 위를 춤추는 바람처럼 오케스트라는 이 아름다운 풍경을 음미하기 위해 미지의 초원 위를 열심히 내달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넓은 초원을 시원하게 헤쳐나가는 바람은 이윽고 풀 숲 사이에 숨어있는 한 대의 피아노를 발견한다. 풀 위를 달려 거대한 물결을 만들어 낸 신선하고 햇살 향기가 가득한 바람 소리는 피아노의 따뜻하고 쾌활한 소리를 만나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어 나가기 시작한다.


온화하지만 언제나 어느 장소에서도 쾌활함을 잊지 않으며 여행이라는 미지의 세계로 당당하게 첫 발을 내딛는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를 닮은 듯이 말이다.


런던에서 사귄 음악 동료들은 한창 빈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 유명한 모차르트의 신작 피아노 협주곡의 악보를 직접 확인하고는 흥분에 휩싸였다.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만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이라니! 그들은 악보를 꼼꼼하게 살펴보고 세세한 설명과 해석, 그리고 정확한 멜로디를 연주하여 눈이 보이지 않는 폰 파라디스에게 들려주었다. 연주 내내 놀라운 집중력으로 음악을 감상하던 그는 3악장의 날래고 민첩한 론도의 연주가 끝나자마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동료의 도움으로 피아노 앞에 앉은 폰 파라디스는 즉시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 위에 그대로 하나의 토씨도 틀리지 않고 모두 재현해내었고 악보를 대조하면서 들은 동료들은 또다시 한번 그의 능력에 놀라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악보 없이 바로 작품을 모두 파악한 폰 파라디스는 1785년 3월, 위풍당당하게 오케스트라의 중심에 위치한 피아노 앞에서 앉아 열 개의 손가락으로 무대 위의 연주자들을 위에서 군림하며 청중들을 압도하였다. 그리하여 1784년 9월 30일에 모차르트의 손을 통해 작곡된 이 작품은, 1785년 3월 영국 런던의 폰 파라디스에게 전달되어 런던을 아름답게 수놓아 청중들에게 황홀한 음악의 세계로 안내하였다.


모차르트가 자신의 음악의 벗,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의 재능에 감명받아 작곡해 그 연주자의 손으로 직접 런던을 아름답게 수놓은 이 피아노 협주곡은 시간을 넘어 현대에도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 전 세계의 피아니스트들이 열 손가락으로 오케스트라에 맞춰 아름답게 콘서트장을 수놓으며 청중들에게 감동을 선사하는 이 작품은 오늘날에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제18번, K.456 내림나장조 Piano Concerto No.18, K.456 B-Flat Major'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이 눈이 보이지 않는 피아니스트의 사연을 간직한 채 오늘날에도 울려 퍼지고 있다.




웨일스 공과 런던에서 짧은 만남이었지만 금세 깊은 우정을 나눈 동료 음악가들의 따뜻한 호의를 간직한 채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 일행은 짧은 기간 동안 자신들을 품어준 거대한 섬에서 떠나 자신들을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위해 다시 한번 서유럽으로 향하였다. 독일 최대의 항구도시, 함부르크로 향하는 배의 갑판 위에서 폰 파라디스는 창작으로 뜨겁게 돌아가는 머리를 식혀줄 차갑고 신선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한창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 작곡판을 분주하게 조립하고 있었다. 작곡에 푹 빠진 폰 파라디스는 한창 마음속으로 반복하며 다듬고 있었던 음악이 자신도 모른 채 갑작스럽게 입 밖으로 새어 나와 스스로 흠칫하다 이윽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는 지금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큰 도전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바로 인간이 만들어낼  있는 가장 거대한 음악 작품, 오페라를 정복하기 위해서 말이다.

폰 파라디스는 이 거대한 작품을 작곡하기 전 준비 운동으로 소박한 피아노 반주에 맞춰 부를 수 있는 가곡을 작곡해보고 있었다. 비록 짧은 분량의 소박한 가곡임에도 불구하고 생생한 감정의 변화가 극적으로 움직이는 형태를 보였다. 마치 오페라라는 거대한 무대를 압축한듯한 이 소박하고도 장중한 가곡들을 벌써 10편 가까이 작곡판에 옮겨서 친애하는 자신의 친구, 리딩거가 깔끔하고 정갈한 필체로 필사를 완료해주었다. 훗날 출판 후 살롱에서 이 가곡들이 노래된다면 가수들은 마치 한 편의 연극 같은 강렬한 이 가곡의 감정선에 따라 자신도 모르게 청중들에게 열정적으로 연기를 펼쳐나가겠지. 이런 상상을 하며 작업이 한창 무르익을 때 어머니의 정겨운 발소리가 다가오는 것이 들렸다. 어머니는 갑판에 앉아 작곡에 열중하는 사랑스러운 딸을 향해 이제 곧 있으면 함부르크에 도착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폰 파라디스는 한창 감정의 곡선이 최고로 솟아오르는 있는 부분에서 작업을 멈추고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얼굴을 들어 말했다. 지금까지 작곡한 작품을 악보로 옮길 수 있게 리딩거를 불러달라는 말을 전하며 폰 파라디스는 상기된 음악 창작의 열기를 가라앉히고 다음을 기약하였다. 


자신의 보금자리인 오스트리아에서 여행을 떠난 지 어언 2년을 지나 3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새로운 세계에 발걸음을 내딛으면서 폰 파라디스는 각 나라들의 신선하고 독특한 문화의 경험을, 그리고 자신이라는 존재가 누군가의 도움이 된 신성한 경험을, 또 누군가에게는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자신의 모습을 멸시하는 속 쓰린 경험을, 하지만 자신의 음악을 듣고 이내 마음을 열어준 화해의 경험과 자신의 음악을 듣고 오늘도 행복을 한 아름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청중들을 바라보며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던 뿌듯한 경험을 쌓아가며 자신의 인생이 새롭게 변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오늘 도착한 함부르크에서 몇 개월의 연주회를 가지고 오스트리아를 향하면서 경유하는 몇몇의 국가에 도착해 조금 더 활동을 하며 이윽고 이 여정의 마침표를 찍게 될 것이다. 언제 다시 이런 장기간의 여행을 할 수 있을진 모르지만 폰 파라디스는 앞으로도 펼쳐질 모든 음악 여행보다 지금 겪고 있는 이 황금 같은 첫 음악 여행이 인생에 가장 소중하지 않을까 생각하였다. 가장 소중한 이 첫 음악여행을 가슴에 품고, 당분간은 이 경험의 달콤하고 아련한 여운과 함께 온전히 자신의 음악과 조국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이후 독일 함부르크에 도착하여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 Carl Philipp Emanuel Bach와의 소중한 인연을 만드는 것을 시작하여 폰 파라디스 일행은 베를린과 프라하를 거쳐 1786년 오스트리아로 돌아와 드디어 그리웠던 자신의 자택에 돌아오게 되었다. 이렇게 3년에 다다른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의 첫 여행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3년 동안 겪은 이 여행을 통해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는 여행의 소중한 경험과 음악의 영감뿐만 아니라 틈틈이 작곡한 자신의 작품도 차곡차곡 쌓아 돌아왔다. 그리고 여행의 마침표를 찍은 그 해, 폰 파라디스는 독일의 라이프치히의 출판사를 통해 자신이 경험한 첫 번째 여행의 기록이 오롯이 담긴 가곡 작품들을 묶어 한 권의 책으로 출판하였다. 

‘나의 여정이 담긴 12곡의 가곡들 Zwölf Lieder auf ihrer Reise in Musik gesetzt’이라는 이름으로.




오스트리아로 돌아온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는 오랜 친구들의 환영을 받으며 몇 날 며칠 동안 여기저기 초대된 파티에 참석했다가 모처럼 여유로운 오후를 맞이한 어느 날이었다.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 창가에 앉아 자신의 방으로 올라오는 정원의 향기를 맡으며 폰 파라디스는 지난 여행을 추억하고 있었다. 비록 여행 은 힘들었지만 직접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 겪은 추억들이 그 고통보다 달콤하게 자신의 기억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자신이 정식으로 출판한 작품. 여행의 기록이 담긴 12개의 가곡이 담긴 정식 출판 악보를 두 손에 들고 쓰다듬으며 각종 초대에 바빠 지금까지 취하지 못했던 이 기쁨에 듬뿍 빠져 음미하였다. 연주자의 삶은 행복했지만 작곡가의 삶은 더 많은 행복은 안겨주었다.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음악이 세상에 태어나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노래될 수 있다는 사실은 언제나 새롭고 짜릿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이제 시작이다, 아직 세상에 자신의 음악의 모든 것들을 보여주지 못했다. 짜릿한 감동 속에서 돌연 듯 강한 포부가 솟아오른 폰 파라디스는 벌떡 일어나 창가에 두 팔을 기대며 세상을 향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뜨거운 온기가 느껴지는 햇살을 향해 지금부터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의 진면목을 세상에 보여주기로 자신만만하게 결심하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폰 파라디스는 사람들을 시켜 오스트리아의 눈이 안 보이는 아이들, 특히 여자 아이들의 대략적인 수를 파악함과 동시에 그들이 어떤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지 알아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프랑스는 이제 박애로 가득한 한 사람에 의해 맹인 아이들은 보다 한 걸음 전진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 그럼 사랑하는 자신의 조국 오스트리아는? 아름답고 고결한 오스트리아의 이면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맹인 아이들을 생각하면 폰 파라디스의 마음 한편에 무언가에 짓눌리며 커다란 응어리가 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 아이들을 편견 없이 바라보며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같은 시각장애인의 입장에 놓인 자신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이제는 오스트리아도 이 소외된 아이들을 위해 움직일 때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의 마음에 음악을 향한 열망과는 또 다른 뜨거운 불꽃이 솟아나기 시작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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