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네 Apr 21. 2022

IX. 너무나 쉽게 잊혀버린
시각 장애 음악가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 | 마지막 편

역사서에서 찾을 수 있는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에 대한 기록은 여기까지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라는 음악가는 화려한 무대에서 자신의 손을 건반 위에 올리는 순간에도, 그리고 시각장애를 가졌음에도 주변의 도움으로 자신의 음악세계를 악보라는 매체로 실존시킬 때도 유럽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인물이었다. 또한 프랑스 장애인들의 인식을 새롭게 바꾸는 토대를 마련할 때도, 화려한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건물 한편에 오도카니 자라나는 연약한 풀꽃처럼 질긴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맹인 아이들을 구제하는 선한 영향력을 끼칠 때까지 유럽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관심을 받은 인물이었다. 자신의 남은 삶을 오롯이 맹아들과 음악을 사랑하는 아이들을 위해 바친 이 여성의 남은 이야기를 들으면 그야말로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답게 마무리지어졌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가 선택한 삶의 말로는 무대 위의 화려한 삶이 아닌, 교육자로서 소박한 삶을 선택하였다. 최선을 다해 자신한테서만 배우지 못하는 특수한 음악 지식을 시각 장애의 아이들에게 전달해주는 삶을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을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전달해준 이 기적의 여성에게도 삶의 여정의 끝에 다다랐다. 역사서에는 이 기적의 여성이 어떻게 사망했는지 기록이 남겨져 있지 않지만 적어도 자신이 사랑한 아이들의 존경과 애도 속에서 조용하게 마무리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그리고 그는 주검이 되어 자신의 가족들이 안장돼있는 폰 파라디스 가문이 마련한 가족묘에 안치되어 편안한 안식을 취하며 자신이 사랑하는 제자들의 성장을 멀리서 지켜봤을 것이라. 자신의 바람이었던 이 아이들을 위해 두 눈이 보이지 않는 여성은 생전 자신이 이 세상에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을 때를 대비하여 아이들을 위해 설립한 비엔나 음악학교가 적어도 1세기 동안 운영할 수 있는 자금을 유산으로 남겨두었다고 한다. 자신이 없어도 아이들이 걱정 없이 자신의 장래를 마음껏 펼칠 수 있게 준비해주기 위해.




그가 펼친 선한 영향과 다르게 한 시대를 사로잡았던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는 사후 그가 남긴 족적이 빠르게 하나씩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그가 출판한 대부분의 작품은 대중들의 기억에서 서서히 잊혔으며 생전 서점과 악기점마다 비치되었던 수많은 악보조차 이제는 하나둘씩 유실되기 시작해 이제는 카탈로그의 기록으로만 남아있는 이 여성의 작품들의 목록을 보며 그저 상상으로만 들을 수밖에 없다. 이렇듯 점점 희박해지는 그의 족적은 커다란 오해를 사기도 하였다. 바로 다른 작곡가들이 작곡한 몇몇 작품이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의 손을 통해 작곡된 작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여성의 작품으로 귀속되어 연주되는 일이 오늘날까지도 발생되었다는 것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보다 조금 더 일찍 활동한 하프시코드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피에트로 도메니코 파라디에스 Pietro Domenico Paradies의 몇몇 작품은 폰 파라디스와 비슷한 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몇몇 하프시코드 소나타가 한 때 폰 파라디스의 작품으로 귀속되어 세상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의 대표 작품으로 인식하는 작품, 시칠리안느 Sicillienne.

2018년, 영국 왕실의 로열 웨딩 때 서약으로 맺어진 아름다운 황실 부부를 위해 온화한 소리를 지닌 첼로를 통해 하나의 작품이 울려 퍼졌다. BBC 올해의 젊은 뮤지션을 수상한 첼리스트 세쿠 카네 메이슨 Sheku Kanneh-Mason이 자신의 첼로를 끌어안고 연주한 작품은 바로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가 작곡한 '시칠리안느'였었다.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감미로운 이 시칠리안느의 작곡가가 바로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이 작품을 자세히 들어보면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가 활동한 고전시대의 작법이 아닌 것을 단숨에 알 수 있다. 반음계를 사용한 세심한 멜로디, 그리고 고전 시대보다 더 자유롭고 촘촘해진 조성 시스템. 이 작품은 현재 19세기에 태어나 20세기까지 활동한 미국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사무엘 더시킨 Samuel Dushkin이 카를 마리아 폰 베버 Carl Maria von Weber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이용한 패러디 작품으로 추측이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몇 작품이 폰 파라디스의 작품으로 귀속되는 것보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신체 기관이 망가져, 어쩌면 장애인들의 인권이 낮았던 당대에 평생 무기력한 삶을 살 수도 있었던 이 여성의 인간승리의 삶이 축소되어 오직 다른 음악가들의 서사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수동적인 여성으로 그려진 경우도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밀로스 포만 Miloš Forman 감독의 희대의 명작으로 손꼽는 영화, '아마데우스 Amadeus'에서 언급되는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가 바로 그 경우이다. 이 영화 속에서 주인공인 모차르트를 자신의 어린 조카의 교사로 임명하려는 요제프 2세의 앞에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한 사실을 고발하게 된다. 자신이 아끼는 한 여제자가 모차르트와 함께하는 음악 수업 중 성추행을 당했다는 내용의 고발을 말이다. 살리에리가 말하는 그 아끼는 여제자가 바로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이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가 요제프 2세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것을 두려워하며 요제프 2세가 제안한 자리에 임명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자신의 제자를 파는 계략을 펼친 것이다. 과연 살리에리는 한 젊은 음악가를 질투하다 결국 눈이 멀어 각별하게 아끼는 자신의 제자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주장을 펼쳤을까? 더 나아가 폰 파라디스에게 협주곡까지 선물해 준 모차르트가 이 여성을 성추행으로 명예를 실추시킬 정도로 얄팍한 우정을 지녔을까? 이 영화가 음악 학자들의 수많은 비판을 받은 작품임에도 치밀한 시나리오와 모차르트와 빈 고전파의 단아하고 우아한 음악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명작임을 인정하는 바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여성이 살아온 뜨거운 삶이 잊히지 않은 채 온전히 오늘날까지 이어졌다면 감독이 이러한 시나리오를 채택했을지 개인적인 안타까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오늘날, 하이든과 모차르트와 함께 빈 고전파의 중심에 있었던 이 여성의 삶을 재조명하기 위한 시도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의 삶을 추적하는 전기와 영화가 제작되고 있으며 시각이 없는 삶을 선택했음에도 두 눈이 보이는 사람들의 끊임없는 치료의 강요로 불편해하는 그 시대의 시각 장애 여성의 삶을 재조명한 실내 오페라가 제작되어 장애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리고 평생 5개의 오페라와 3개의 칸타타, 12개의 피아노 소나타와 8개 이상의 피아노 작품, 그리고 피아노 반주와 함께하는 가곡까지 다양한 음악을 작곡한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의 유실된 악보들. 이 악보들을 찾기 위해 오늘도 학자들은 끊임없이 낡은 고서의 냄새를 맡으며 여러 기록소를 뒤지고 있으며 음악가들은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그의 작품을 끊임없이 무대에 올리며 그의 삶을 현재로 이으려는 노력을 펼치고 있다. 그 노력으로 체코에서 최초로 여성이 작곡한 오페라이자 여성이 지휘한 최초의 오페라로 인정받는 '리날도와 알치나 Rinaldo und Alcina'의 악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체코의 스타보브스케 극장 Stavovske divaldo의 기록소에서 뮌헨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유실되었다는 것을 밝혀내어 이 악보의 행적을 따라 많은 학자들이 찾아가고 있다. 또한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의 '수험생 Der Schulkandidat'이라는 오페라 또한 악보가 유실되어 이제는 연주할 수 없는 작품이지만 다행히 오페라를 여는 서곡을 담은 악보는 고스란히 발견되어 유럽에서는 '여성의 날'이 되는 달이 되면 잊힌 또 다른 여성 작곡가들의 작품과 함께 이 오페라의 서곡을 연주하며 그의 삶을 되돌아보고는 한다.


'나의 여정이 담긴 12개의 가곡'의 표지


그리고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의 작품 중 유일하게 악보가 온전히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인 ‘나의 여정이 담긴 12개의 가곡 Zwölf Lieder auf ihrer Reise in Musik gesetzt’.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가 무대 위에서 가장 빛나던 유럽 여행에서 만난 음악이나 인물, 그리고 문학작품을 고스란히 자신의 음악작품으로 탄생시킨 12개의 가곡. 피아노 반주에 맞춰 부르는 이 소박한 노래에서 그의 초기 음악 스타일을 살펴볼 수 있는 이 작품에서 희극과 비극, 그리고 온화함과 격정까지 상반되는 다양한 감정들을 이 작품에서 만날 수 있다. 





곧 너의 헐벗은 팔과 다리 위로
모든 종류의 날씨가 잔인하게 떨어질 거야.
곧 허기가 너희를 다시 괴롭힐 거야.



격정적이고 비극적인 피아노 반주가 등장하며 대번에 청중들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그 격정적인 반주가 비극적인 한 동기를 미처 노래하기도 전에 바로 소프라노 가수가 그 비극을 이어가기 시작한다. '새로운 비참함 neuen Jammer', '고통 Schmerz' '근심 Qual', '잔인함 Grausam' 등 살아가면서 들어본 모든 삶의 괴로움을 표현한 단어가 가사 전체에 등장하며 비극적인 음악과 함께 절정으로 치닫는다. 감정의 최절정에서 높게 도약하는 멜로디. 높이 도약한 멜로디는 희망으로 향하지 않는다. 도약한 음은 서서히 하강하며 또 다른 비극으로 향할 뿐이다. 


'나의 여정이 담긴 12개의 가곡' 중 제8곡인 '가난한 자의 아침 노래 Morgenlied eines armen Mannes'는 일절의 희망이 없이 길거리를 배회할 힘도 없이 주저 않은 가난한 사람의 심정을 담아내고 있다. 독일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요한 티모데우스 헤르메스 Johann Timotheus Hermes가 써 내려간 이 시를,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는 자신의 마법으로 충실한 형식미가 감도는 아름다운 음악을 함께 곁들였다. 


한 편의 시가 품고 있는 비극을 훌륭하게 포착한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의 이 가곡은 당시 살롱에서 귀족들의 입을 통해 품격 높은 음악극을 펼치게 도와줬을 것이다. 여행에서 만난 다양한 문학과 경험을 음악으로 만난 유럽 사람들은 이 가곡을 작곡한 두 눈이 먼 여성이 우리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를 살아가는 나는 이 음악을 듣고 상상해본다. 지금은 잃어버려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그 여성의 오페라. 나는 이 소박한 가곡을 통해 그 여성이 작곡한 오페라를 상상해본다.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의 오페라를 상상해 보는 나의 머리는 동시에 한 가지를 더 고민해본다. 이 여성이 작곡한 모든 작품이 지금까지 온전하게 남아있다면 고전시대의 중심에 위치하여 고전시대의 음악을 발전시킨 빈 고전파의 이야기는 더 풍성해지지 않았을까. 하이든, 모차르트, 하이든. 오직 3명의 음악가를 중심으로 배우게 되는 고전시대에 숨겨진 이 시각 장애 여성 음악가는 현대의 우리에게 음악사뿐만 아니라 유럽사에 더 넓은 시각을 안겨주지 않았을까. 오페라부터 펼쳐진 생각이 이러한 결과까지 도달했을 때 서양음악사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은 비 오는 날처럼 먹먹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이든이 이 여자 아이를 위해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살리에리가 자신의 사랑하는 제자를 위해 작곡한 오르간 협주곡. 

그리고 모차르트가 자신의 벗을 위해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제18번. 


빈 고전파의 이 모든 중심인물들이 열광한 시각 장애 피아니스트,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 

시각을 잃었지만 고도로 발달된 감각으로 일반인들은 범접하지도 못할 자신만의 아름다운 음악의 세계를 마음에 품고 있었던 고전시대 여성 가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당시 무시당했던 시각 장애인들의 희망을 안겨주며 외면당한 그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친 음악가. 

어느 날 문득 모차르트의 음악을 감상할 때든, 혹은 시각 장애인들이 자신들만의 뜨거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뉴스를 지나가듯 접할 때든 한 번쯤은 당대 시각 장애 여성 음악가로서 뜨거운 삶을 살아간 이 여성의 삶을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그의 삶이 역사의 뒤편에 묻혀있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삶이니까.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 Maria Theresia von Paradis (1759~1824)
이전 14화 VIII. 무대 뒤편에서 찾은 진정한 미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