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전략적이고 정략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정말 오랜만에 에너지 발산이 비등하게 느껴지는 사람을 만났다. 어떤 힘이 담긴 눈을 정면에서 바라보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눴던 시간이 얼마 만이었는가. 나를 알아가고, 내가 해야 할 것에 대해 쉬지 않고 생각하며, 생각을 정리하고, 끊임없이 행동으로 말로 증명해내는 그런 에너지. 그게 우리가 가져야 할 그 알맹이 한 꼬집 아닐까. 나는 자타 공인 일 벌이기 대마왕으로서 이렇게나 나에 비등하게 에너지를 발산하는 사람을 만나면 왠지 모르게 신이 난다. 어쩌면 같은 나라, 같은 지역에 살면서 옷깃 하나 스치기 어려웠던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이 사실도 너무 경이롭다.
4시간 반을 쉬지 않고 꼬박 나누었던 대화의 주제는 ‘목표를 위한 전략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였다. 대화를 하다 문득 목표에 다다르기 위해 전략적 이어질 수 있는 마음가짐도 여태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는 사실이 새삼 느껴졌다. 한국 사회에서는 여성이 전략적 포지션을 취하면 온갖 여혐적 시선에 갇혀버린다. ‘말하는 내용은 좋은데 말이 너무 쎄지 않아?’, ‘그렇게 자기주장이 강해서 어떻게 할래?’, ‘그렇게 살면 힘들지 않아?’, ‘왜 그렇게 피곤하게 살아?’. 주변의 온 세상이 물음표 살인마가 되어 나를 몰아세운다. 그리고 그 질문의 끝에는 ‘여자가'가 따라붙는다. 그 결과 우리들은 ‘완벽의 코르셋’을 뒤집어쓰고 ‘어떤 시작’에 대한 공감과 인정, 존경을 받기 전, 스스로의 비전과 목표에서 초점을 놓쳐버리기 일쑤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걸 왜 하고 싶은지’, ‘어떻게 하고 싶은지’는 우리들의 삶에서 중요한 논점이 아니었다. 아무도 묻지 않았기에 스스로 생각해 보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이런 시선을 가진 세상에서 길러져 온 많은 여성들은 ‘야망'을 외치면서도 눈치를 본다. ‘해도 되나? 할 수 있나? 잘 될까?’
되묻고 싶다.
‘하면 왜 안 돼? 해봐야 알 수 있는 거 아니야? 잘 안되면 어때?’
내가 책을 써야지 하고 생각했을 때, 내게 가장 필요했던 건 타이틀이었다. ‘내가 뭐라고’, ‘나란 사람이 쓰는 글을 누가 읽어주기나 할까?’. 주변을 둘러 봤을 때 신선하게 다가왔던 건 브런치나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다른 작가들이었다. 그들의 저서는 브런치나 블로그에서 시작된 경우가 많았다. 자가 생산이라고 하면 될까. 끄적이던 글을 책으로 엮고 그 책을 저술했음을 바탕으로 다시 글을 쓴다. 물론 더 깊은 지식을 필요로 하고 더 많은 앎을 바탕으로 쓰인 많은 책의 경우는 전문성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하지만 생각보다 굉장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그냥 써 내려 간 글'로 새로운 타이틀을 취한다. 여타 모든 분야가 거의 그러하듯 이런 타이틀 메이킹에서도 두드러지는 건 성비의 차이였다. 뭐라 정의하기 어렵다. 내가 훑어본 경험이 다라고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저렇게는 나도 쓰겠다' 싶은 글을 보고 ‘그럼 나도 써서 책이나 내봐야지’까지 생각이 연결되는 경우는 압도적으로 남성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이는 비단 책을 쓰는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착함'과 ‘공감'을 강요받고 자라온 많은 사람들은 어떤 결과물을 바라볼 때 그 자체에 대한 칭찬이나 공감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글을 써서 책을 낸 행위 자체가 행위자에게 가져다 주는 이익-그게 비단 금전적인 결과가 아닐지라도-에 대해서는 긴밀하게 생각해보지 않는다.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보자. 그 결과물은 그 창작자에게 어떤 가치가 되어 돌아갔는가.
‘책을 쓰는 행위’에서 벗어나서 ‘책을 냈다'는 경험적 타이틀은 ‘나'를 작가로 만든다. 그 타이틀은 내가 어떤 연단에 오를 수 있게 해주고, 연단에 오르는 행위는 나의 말에 공감하는 사람을 면대면으로 만나는 경험을 만들어 준다. 그 경험은 또 다른 이야기를 만나 다음 책을 쓸 수 있는 소스의 확장을 가져온다. 또 내가 서술했던 것들을 증명하고 간증하는 이들을 만나 응원을 받고, 용기를 얻고, 자신감을 높이는 토대가 된다.
경험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사람은 보고 듣고 체험한 그 경험의 뼘만큼 자라난다. 그래서 경험 자체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은 그 경험 자체의 소중함으로 존재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많은 성공한 이들의 행적을 따라가 보면 하나의 경험이 라벨이 되어 그 사람의 성공을 더욱더 견고하게 만들어 준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주 깨끗하고 바람직한 모습인가를 나에게 물으면 그건 아니라고 대답할 거다. 그러나 우리가 버리고자 하는 코르셋에는 이러한 높은 도덕적 기준도 포함된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고 다양한 생각들이 있는데, 이 다양성과 기준들에 모두 부합하는 완벽성을 찾기까지 나의 목표를 위한 걸음을 쉬어 가야 할까.
타이틀과 라벨은 보증 수표다. ‘저런 사람이 한 일이니까'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그렇다면 역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타이틀을 따기 위한 노력 이전에 그 타이틀 자체일지도 모른다. 너무 약삭빠르게 느껴지는가? 뭔가 좀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가? 유튜브에 ‘강연'이라고 검색해보자. 다 들어 볼 필요는 없다. 많은 경우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조금 더 정제했을 뿐 특별하지 않은 것을 특별해 보이게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연사'로서 살아간다.
나는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일단 뭐든 써야겠다. 나는 나고, 읽고 싶은 사람들은 읽겠지. 그중에 공감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고 내가 나에게 던졌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사람들도 생기겠지. 이 직설적인 생각이 강하고 세게 들리는 사람도 분명 있을 테다. 겸손하고 에둘러서 모두를 포용하는 방식의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느끼게끔 사회로부터 길러져 왔다. 있는 그대로를 얘기하면 날 것 그대로 민낯을 보는 기분이라 얼굴이 화끈거릴 때도 많다. 하지만 인정해야 보이고, 보고 나면 넘을 수 있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하면 왜 안 돼?’ 이유가 잘 생각나지 않으면 일단 해보는 거다. 해보면 노하우가 쌓이고 지식이 쌓인다. 또 물어보자 ‘해봐야 알 수 있는 거 아니야?’. 내가 하고자 했던 것들이 나랑 맞는지 안 맞는지는 그것을 해 봤을 때에야 알 수 있다. 머리로 그린 그림은 허상 속에 존재하지만, 행동으로 그린 그림은 나 자체를 만든다. 여기까지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이왕 할 거면 잘~’하고 말끝을 흐린다. 그게 바로 우리가 벗고자 했던 ‘완벽의 코르셋'이다. 수백 수천 번의 실험이 우리 삶을 윤택하게 했듯 어떤 일에는 항상 시행착오가 따라붙는다. 기업이나 저명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성공 사례는 이야기하되 실패 사례를 이야기하지 않는 건 창피하거나 쪽팔려서가 아니라, 그 실패 사례가 무수히 많은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를 딛고 일어나게 한 원동력이자 경험치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묻고 싶다. ‘잘 안되면 어때?’. 어떤 일이 잘 안 되는 건 내가 못나서가 아니다. 방향성이 분명하지 않았거나 방법이 미숙했거나. 분명 어떤 기인들이 있다. 이러한 시행착오의 경험들은 ‘잘 안되는' 경험을 해보지 않으면 쌓이지 않는다.
우리는 ‘스노우 볼'이라는 단어를 부정적인 현상에 많이 덧대어 사용한다. 하지만 어린 날 눈덩이를 굴려 눈사람을 만들던 그 웃음의 시간을 기억에서 더듬어 보자.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도 그렇게 눈덩이를 크게 만들던 날과 같으면 좋겠다. 흩날리던 눈이 소복이 쌓여 있으면 발에 밟혀 진흙탕이 되기 일수다. 반면 꽉꽉 눌러 담아 굴리고 굴려 눈덩이를 만들어 한 덩이, 두 덩이 쌓아 올리면 그 단단한 눈덩이가 어느새 나를 보고 웃는다. 크기가 꼭 크지 않아도 좋다. 쌓아 올려본 눈덩이가 많아질 수록 더 크고 단단하고 오래가는 눈사람을 만들 수 있다. 하다못해 뭉친 눈덩이가 너무 작아 눈사람이 아니라 눈싸움을 하게 되더라도 그 ‘스노우 볼'은 내 스스로의 무기가 된다. 눈덩이를 굴리듯 나의 경험들을 굴려보는 용기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무거로 만들어 내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