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 기획자가 3개월 만에 스타트업에서 뛰쳐나온 이유

포부는 좋았습니다.

by 하단

신입 전 스타트업을 잠깐 다닌 적이 있다. (다녔다기엔 3개월도 안 넘겼지만) 나름 스타트업을 꿈꿨었다.


나는 취업 전 여러 가지 사이드 프로젝트를 하면서 느낀 답답함이 있었는데 학생, 취준생끼리 하는 프로젝트에서는 프로젝트 규모가 한계가 있었다. 또한 진행하다가도 출시도 못하고 와해되는 일도 빈번했다.


회사에 들어가면 이런 답답함을 해소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내가 했던 프로젝트보다 더 크고 체계가 있는 프로젝트를 맡을 수 있을 것이고, 여러 가지 일을 직접적으로 접하면서 단시간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랐다.


이런 나와 적합한 곳이 스타트업이라고 생각해서 스타트업에 대한 로망이 가득했다. 개개인의 역량을 믿고 혁신을 꿈꾸려는 이미지, 자율적인 분위기가 겉보기엔 얼마나 낭만 넘치는가.


그렇게 시리즈 A를 막 넘긴 30-40명 규모의 성장하는 스타트업에 들어갔다.


당연하게도 현실은 달랐다. 이것은 ‘신입 기획자로 스타트업에 들어가기’ 전 나는 아주 큰 착각이었다. 물론 모든 스타트업이 그렇지는 않지만 나의 경험은 신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스타트업이었다.


그럼에도 스타트업에 입사한 누군가는 공감할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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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3개월 만에 퇴사한 이유는 첫 번째로, 배울만한 기획자 선임의 부재다.


많은 스타트업이 생각보다 기획팀이 없다. 초반에는 개발자와 디자이너끼리 서비스를 출시하며 그중 CEO가 PM이자 기획자이자 사업까지 한다.


내가 입사한 시점에는 기획팀이 존재하지 않았고, CEO가 복잡해진 서비스를 맡아줄 PM을 채용하여 기획팀을 만들려는 과도기였다. 면접 당시 시니어 기획자를 2명이나 채용 예정 중에 있으며, 그들은 이 분야에 빠삭하여 배울 점이 많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배울만한 시니어 기획자가 오는구나’라고 단순한 안도했었다.


하지만 이건 나의 큰 착각이었다. 한 명은 디자이너를 하다가 왔고, 한 명은 사업기획을 하다가 왔는데 PM/기획 분야는 본인들도 처음이었다. 심지어 요구사항정의서, IA, 화면설계서 같은 것들은 다뤄본 적도 없고, 어떤 문서인지조차 몰랐다.


또한 그들도 새로운 직무에 더하여 갑자기 주어진 큰 역할에 너무 혼란스럽고 선임이 필요했기에 나를 돌봐줄 신경 쓸 여력은 없었다. 어찌 보면 그들도 회사 경력만 쌓였지 여전히 주니어였던 것이다.


그래서 정작 요구사항정의서, IA, 화면설계서 같은 문서는 내가 모두 도맡아 했고, 마땅한 피드백조차 받지 못했다. 나의 피드백 요구에 향식적으로 쥐어짜듯 답을 했고, 페이지 ID를 붙였다가 뗐다가 화면설계서에 디자인된 완성본을 넣는다거나… 나에게는 조금 ‘이게 지금 중요한가?’ 싶은 요구에 속으로 화가 나기도 했다.


나는 주변이 어떻게 굴러가든 ‘이거 하나라도 배우면 의미 있다’라는 생각 하나만 있어도 긍정적인 편이다. 이것이 안 되는 순간 나는 탈출을 결심했다.



두 번째는 회사 내부의 프로세스의 부재다.


스타트업이 투자를 받으면서 점점 규모는 커지는데 체계는 복잡해지고, 이를 CEO가 계속 도맡아 하기엔 너무 바빠졌을 때 서비스를 이끌어 줄 PM을 찾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프로세스의 도입에는 조직원들의 변화가 필요하다. CEO의 직접 지시하면 결정에 익숙하거나, CEO도 자기가 키워온 서비스를 PM에게 마냥 맡길 수도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규모 때는 바로바로 결정되던 것들이 이제는 복잡한 의사결정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다. 인원이 많아지면 문서가 생기고 커뮤니케이션을 더더욱 신경 써야 하니 이런 말도 이해가 안 되지는 않았다.


그저 필요성을 느끼는 CEO은 우리를 뽑았고, 우리가 일할 실무자는 필요성을 못 느끼는 데에 씁쓸함이 있었을 뿐이다. 당연하게도 자칭 시니어끼리는 조직적인 갈등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고 그 신경전 속에 신입 기획자인 나는 선임이라는 사람의 뒷담을 들어주는 것밖에 없다.



세 번째, 신입은 신입이다.

내가 아무리 리더십 가득 찬 포트폴리오를 만들어가도 신입은 역할이 한정되어 있다. 애초에 큰 변화를 일으킨다거나 혁신을 꿈꾸는 역할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실수해도 가장 영향이 적은 일을 맡게 된다. 이건 어느 조직에서나 같다. 따라서 스타트업에서 많이 배운다는 것은 내 분야의 전문성을 키운다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중요하지 않은 잡일을 한다거나 강제로 다른 일을 떠맡게 되는 일이라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어찌 되든 나는 이러한 이유로 처음 들어갔던 스타트업을 3개월 만에 나왔다. 심지어 퇴사일을 정할 때 ‘내일 나가겠다’고 했다. 마침 상반기 공채가 시작되는 조짐이 보이던 때였고(그럼에도 신입 기획자를 뽑는 곳은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한 번 내본 회사에 1차를 합격하여 여기를 준비하고 싶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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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하나 낸 회사가 붙어서 현재는 판교의 IT 기업에 다니고 있다. 훨씬 좋은 연봉과 복지가 있었고, 무엇보다 체계가 있었다. 어떤 직무든 신입이라면 확실히 내가 걸어갈 것 같은 길을 앞서 걸어본 사람이 옆에 있고, 업무 체계를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부정적으로 말했지만 나는 스타트업으로 가고 싶은 사람이다. 단, 내가 1인분을 온전히 하고 어떤 의사결정을 해도 믿을 수 있는 경험이 쌓였을 때가 스타트업에 갈 수 있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더 성장하여 2~3인분 이상의 퍼포먼스를 낼 수 있을 때(정해진 체계에 맞추기에 스스로의 능력이 아까울 때)가 가장 좋은 시기 아닐까.


누군가가 조언을 구한다면 나의 답변은 '가지 마라'가 아니라 '무턱대고 가지 마라'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체계가 없는 곳은 준비되지 못한 상태의 연속이 될 수도 있으니.

이렇게 기획자 신입의 스타트업을 3개월 체험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