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었다고 믿었던 감정은, 가끔 꿈처럼 돌아온다.
아직도, 가끔씩 꿈을 꾼다. 이미 지나간 사람인데, 꿈속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웃고, 나와 함께 걷는다. 마치 어제 본 사람처럼 익숙한 얼굴로, 예전처럼 나를 바라보며 말없이 웃는다. 그 순간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내가 지금 이게 꿈인지조차 잊게 만든다. 손끝이 닿고, 눈이 마주치고, 아무 말 없이 나란히 걷는다. 그 장면이 너무 선명해서, 꿈에서 깬 후에도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게 된다. 일어나야 하는데, 이불을 걷어내야 하는데, 그 사람이 남기고 간 공기 같은 감정이 방 안에 떠다니는 것 같아. 그대로 누워 있는다. 괜히 휴대폰을 켜서 아무 데도 전화를 걸지 못한 채로 통화 목록을 몇 번이나 뒤적이고, 예전에 그 사람과 주고받았던 메시지를 다시 찾아보는 일도 하지 못한다. 이미 다 지웠으니까. 정말 끝났으니까. 근데 왜 꿈은, 그걸 또 꺼내는 걸까.
그 사람은 이제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의 곁에서, 누군가의 하루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 아침 인사를 건네고, 저녁의 피곤함을 함께 나누고, 익숙한 이름으로 불리고,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사람. 내 삶과는 이제 아무런 교차점이 없는, 완전히 분리된 또 다른 세계 속의 사람. 그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마음 어딘가엔 여전히 그 사람과 함께였던 시간의 잔상이 남아 있다. 내가 미처 닫지 못했던 문, 아니면 열어둔 채로 오랫동안 바라만 보고 있던 창 같은 감정. 어쩌면 꿈은 그 감정의 창문을 살며시 열고, 바람처럼 들어오는지도 모른다. 그 사람은 오래전 지나간 계절인데, 나는 왜 여전히 그 계절의 온도를 기억하고 있는 걸까.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데. 그리움도, 사랑도, 미련도 아닌데. 정말 아무 감정도 남지 않은 줄 알았는데. 그런데도 꿈에서는 웃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아무렇지 않게 그 웃음에 또 웃고 있었다.
가끔은 그런 생각도 한다. 내가 그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 사람과 함께였던 ‘나’를 그리워하고 있는 걸까. 처음으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던 그 시절의 감정,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던 공기, 내가 전부였던 것 같은 순간. 그 사람의 얼굴보다 그 계절의 햇빛을 더 또렷하게 기억할 때가 있다. 그때의 내가 참 따뜻했구나, 참 조심스러웠고, 동시에 참 무모했구나. 그 사람에게 다가갈 때의 숨죽이던 순간, 사랑이라는 말보다 먼저 나를 건네던 시간. 그 시절엔 그런 마음들이 있었다. 지금은 조금 더 계산하고, 조금 더 방어하고, 조금 더 아프지 않기 위해 거리를 두지만, 그때는 상처받는 것조차도 그 사람이라면 괜찮을 것 같았던 마음. 그게 아마 첫사랑이라는 이름의 감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시간이 지나고, 모든 게 끝났는데도, 그 사람은 내 꿈속에서 여전히 처음처럼 나를 웃게 만든다.
사실 현실에선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연락도 끊겼고, 서로의 소식도 모르고, 다시 마주칠 일도 없고, 설령 마주친다 해도 인사조차 나누지 않을 그런 사이. 서로를 잊었고, 각자의 길을 살아가고 있고, 이제는 누군가의 연인이 되었고, 누군가의 가족이 되었고, 그렇게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성적으로는 다 이해했고, 감정적으로도 다 털어냈다고 믿었는데, 꿈이라는 건 참 이상하다. 잊은 줄 알았던 마음을 아주 조용하게, 아주 정확하게 건드린다. 그날따라 조금 허전했을 뿐인데, 그게 마음속 어딘가를 스쳤고, 스친 감정은 그대로 꿈으로 흘러들어간다. 꿈은 기억보다 더 깊은 곳에 닿아 있고, 그 안에서 나는 여전히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른다. 아무도 듣지 못하지만, 내 안에서는 그 이름이 아주 또렷하게 울린다. 나는 여전히 그 이름을 알고 있고, 그 이름이 가진 온기를 기억한다.
사랑이라는 감정보다는, 그 시절의 ‘전부였던 느낌’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전부였던 나, 누군가를 전부로 여겼던 나. 그게 그 사람이어야 했던 건 아닐지도 모른다. 그때 그 감정을 느낄 수 있었던 내가 그리운 거다. 지금은 더 이상 그렇게 사랑하지 못하고, 그렇게 웃지 못하고, 그렇게 무방비한 감정을 꺼내지 못한다는 사실이 어쩌면 가장 아픈 거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어하는 게 아니라, 그때의 나를 다시 만나고 싶어지는 건지도 모른다.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걸 알게 되었던, 그 모든 게 서툴렀지만 진심이었던 시절의 나를. 이제는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꿈속에서는 그 시간을 다시 걷는다. 그 사람은 웃고 있고, 나는 그 사람을 보며 웃는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걷다가, 잠에서 깬다.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은 조금은 아프다.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인데도, 그걸 꿈에서 다시 확인하고 나면 이상하게 마음이 조용해진다. 조금 무너진다. 그리고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하루처럼 일상을 살아간다. 누군가에게 말하지도 못하고, 괜히 하루 종일 마음이 헛헛한 이유를 스스로도 정확히 설명하지 못한 채로, 그런 하루가 그냥 흘러간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꿈은 아프면서도 따뜻하다.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기억이 나를 웃게 했던 건 사실이다. 그게 현실이 아니었다는 게 다행이기도 하고, 동시에 아쉽기도 하다. 그래서 괜찮다고 말해본다. 그 사람은 지나간 계절이고, 나는 아직 남은 계절을 살아가야 하니까. 내 앞에 펼쳐진 시간들은 여전히 나에게 남아 있고, 그 계절들 속에서 나는 또 누군가와 웃게 될 수도 있고, 또 누군가의 전부가 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렇게 믿어본다. 그리고 오늘도 조용히 하루를 살아간다. 아주 가끔, 그 사람의 이름이 꿈속에서 다시 떠오를 수는 있겠지만, 이제는 그 이름을 조용히 보내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가끔은 잊었다고 믿었던 이름이
꿈에서 나를 다시 불러낸다.
그건 끝이 아니라,
내 마음이 아직
따뜻했던 계절을 기억하고 있다는 증거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