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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Chu Jun 14. 2018

몬트리올의 빛

고맙다 여행 - 몬트리올 편

몬트리올의 기원


“어쩌면 몰락이란 우월한 사람을 보고 그들을 닮으려 하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 오르한 파묵의 <하얀 성> 중    


약소민족에게 ‘정체성을 지키는 것’과 ‘주류사회와 공존하기’는 힘겨운 줄타기와 같다. 정체성을 고집하다보면 경쟁에서 도태되기 쉽고, 강자의 논리를 인정하면 순식간에 정체성을 잃고 ‘몰락’하게 되기 때문이다. 도태 혹은 몰락, 이것이 대다수 약소민족이 처한 운명이고, 그것을 피하면서 계속 생존해 나가는 것이 시대적 과제가 된다. 우리만 해도 북한은 도태에서, 남한은 몰락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약소민족이 스스로 우월하다고 자부하는 프랑스인이라면? 퀘벡 주는 그런 곳이다. 이민자들이 서로의 정체성을 애써 외면하며 뒤섞여 살아가는 북아메리카에서 퀘벡은 민족적 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독립행정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지역이다. 혼종문화에 익숙한 북미사람들은 ‘북아메리카의 파리’, ‘아메리카의 유럽’이라 부르며 그곳으로 즐겨 여행을 떠난다. 유럽적 정취를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이유가 가장 크겠지만, 어쩌면 단일문화가 주는 정서적 안정감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기 때문인 것도 같다.           


캐나다 동쪽 끝, 본토와 다소 동떨어져 자리를 잡고 있는 퀘벡 주. 이곳은 유럽인들이 대서양을 건너 캐나다 지역에 처음 발을 디딘 곳이다. 초기 유럽 이주민들은 주로 아메리카 동부 연안에 자리를 잡았다. 프랑스인은 북쪽에 모여 누벨프랑스, 영국인은 남쪽에 모여 뉴잉글랜드라 불렀다. 모피와 목재 등 무역규모가 커지자 그들 사이에 이권충돌이 생겼고, 프랑스인과 영국인은 해당지역의 인디언들과 연합해 전쟁을 벌였다. 이름 하여 ‘프렌치-인디언 전쟁(1755-1763)’. 이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인은 광활한 아메리카를 장악할 수 있었고, 프랑스인들은 본토로 나아가지 못하고 최초 정착지에 머물며 자치주를 만들었다. 그곳이 지금이 퀘벡 주이고, 그중에서도 레알 산(몽레알, Montréal)을 중심으로 형성된 가장 큰 도시가 몬트리올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약소민족이라기보다 고립된 정복자들이라 할 수 있고, 지금도 분리 독립을 호시탐탐 엿보고 있다. 이 과정의 진짜 피해자는 따로 있다. 영토를 보장해주겠다는 약속을 믿고 두 나라 군대와 함께 싸웠던 약소민족인 인디언 부족들만 몰락해버리고 만 것이다.  


몬트리올 노트르담 성당 앞 다름 광장. 도시를 세우는데 공헌한 인물들을 모아놓은 동상이 세워져 있다.  


추운 나라의 프랑스인


퀘벡 주는 사람이 살기에는 추운 곳이다. 퀘벡 주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몬트리올은 그나마 일 년에 3-4개월 여름이 있다. 그들은 이 기간 중 기다렸다는 듯이 각종 페스티벌을 벌인다. 하지만 우리가 간 4월은 아직 겨울이었다. 몬트리올의 매력은 긴 겨울과 장식적인 프랑스문화가 만나 빚어내는 독특한 정취에 있다. 전체적으로 북유럽 스타일에 프랑스식 장식이 더해진 형태로, 춥고 황량한 산골에 유배된 부유한 예술가의 전원주택 단지 같은 느낌이었다. 

그 단적인 예가 되는 풍경이 주택가의 계단이다. 우리처럼 건물 내부에 공동계단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길에서 바로 옥외계단을 통해 각층의 현관문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다. 계단은 장식적인데 반해, 집 내부는 단순하고 실용적인 북유럽 스타일이다. 전체적인 건물의 규모는 옆 건물과 맞추되 벽면의 모양과 색은 적어도 옆집과는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대개 현관이 깊고, 위에는 캐노피가 있다. 현관이 깊은 이유는 아마도 폭설이 내렸을 때 눈을 털고 들어갈 공간이 필요하기도 하고, 눈이 많이 쌓였을 때에도 문을 열수 있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모든 건물이 일견 단조로워 보이지만 잠시 멈춰 서서 들여다보면 곳곳에 장식이 숨어있다. 그 모든 장식에 그리움이 베어나는 것처럼 느낀 것은 지난 역사에 대한 과도한 집착 때문이었을 것이다.     

   


몬트리올 미술관 


토론토에서 2박 3일의 일정으로 떠났지만 800km 거리를 가고 오는데 하루씩 걸리다보니 정작 도시를 둘러 볼 시간은 하루 밖에 없어 많은 곳을 둘러보지는 못했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몬트리올 미술관(Musee des Beaux-Arts de Montreal)'. 르네상스와 근현대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그림을 공백 없이 촘촘히 모으려 애 쓴 티가 역력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경우 로코코 스타일과 19세기 말 프랑스 아카데미즘 화가들의 작품이 많다는 점에서  역시 프랑스적이었다.

개인적으로 ’부게로‘나 ’타데마‘ 같은 아카데미즘 화가의 작품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은 가장 큰 소득 중 하나였다. 권위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인상파 화가들을 아마추어라 깔아뭉갠 그들.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다하여 ’뽕삐에(소방수, 우리말로는 꼰대)‘라 불렸다. 당대에는 호의호식하였으나 시대에 뒤떨어진 탓에 죽자마자 곧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회화적으로는 역대 최고의 기술적 경지에 이르렀던 그들인 만큼 직접 보면 높은 완성도 때문에 누구나 그림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근대의 그림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인상파,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화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중요한 화가의 작품은 소품이라도 구해서 걸어놓았는데, 특별히 유명한 작품이 없어서 그런지 정신없이 유행이 변하던 당시의 미술적 경향을 오히려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번에 그림들을 주욱 보면서 새삼 느낀 것은 피카소의 천재성이었다. 대담한 표현, 색채는 물론 검은 선과 형태의 재구성까지... 그는 인상파 이후 모든 유파의 미술적 장점을 이미 완벽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감각적으로 재구성하는데 뛰어났던 화가였음을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아무렇게나 그린 것 같지만 치밀한 분석이 깔려 있음을 목도했을 때의 충격과 보람은 그곳이 몬트리올 미술관이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오랜만에 찾은 서양미술관이었기에 유난히 눈에 남는 작품들이 많았다. 에스키모 원주민들의 조각품들도 매우 인상적이었고, 이곳에 아프리카 전통미술 전시관이 따로 있는 이유도 궁금하고... 하지만 그날 본 인상 깊은 작품들에 대한 얘기는 다음 기회에 풀어놓기로 하고 오늘은 이쯤에서 미술관 밖으로 나서려 한다. 

르네상스 미술 전시실의 신군. 이번 여행사진 중 가장 맘에 드는 사진.

한번 들어갔다하면 빠져나오기 어려운 곳이 미술관. 우리는 결국 관람종료 방송에 쫓겨 가며 전시실들을 들락거렸고, 문 닫는 기념품 가게에 들어가 엽서 몇 장을 가까스로 사서 나왔다. 차를 주차해 놓은 골목길을 찾아 언덕을 걸어 올라가다 뒤돌아 몬트리올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미술관과 도심 위로 초저녁 찬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미술관을 잘 꾸미고, 힘닿는 대로 좋은 그림을 사 모으는 행위가 일종의 절박함으로 다가온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런데 아뿔싸. 차로 돌아와 보니 뒷자리의 유리가 박살이 나있다. 뒷자리 시트 위에 족히 300미리는 되어 보이는 흙 묻은 신발 자국이 찍혀있고, 차 안에 두었던 GPS 빈 케이스가 열린 채 나뒹굴고 있었다. 아마도 뒷자리에 있던 렌탈 GPS의 빈 케이스를 노트북케이스인 줄 알고 훔쳐가려 했던 듯. 다행이 처남 선물용으로 산 핀란드 헤비메탈 밴드 ‘나이트 위시’의 티셔츠가 든 비닐 봉다리는 무사히 남아있었다. L.A에서 차 안에 뭔가를 두고 내리면 안 된다는 경고를 여러 번 들었는데, 몬트리올에서 잠깐 방심한 사이 사고가 터졌다. 미국이나 캐나다나, 토론토나 몬트리올이나 잡범들의 행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없어진 물건이 없고 몸 상하지 않았으니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림에 대한 긴 여운을 도둑맞은 것은 확실했다. 



선명하게 남은 희미한 빛 


그날 밤. 숙소 뒤편의 테라스에서 동네를 내려다보았다. 고요하기 짝이 없는 밤이었다.

이렇게 조용하고 평온한 그들에게 분리독립이 어떤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남모를 복잡한 사정이 있겠지만, 적어도 여행자가 보기에는 독립도 좋지만 지금처럼 경계가 없는 채로 은밀한 침투를 주고받으며 생성해나가는 문화야말로 그들의 진정한 매력이라 생각되었다. 웬만하면 세상의 모든 분리독립을 지지하는 쪽이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이 추운 곳에서 지금보다 더 프랑스 같아지는 것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조금 덜 선명하더라도 지금 이 자리를 둘러싼 환경과 어울려가며 독자적인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이 훨씬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그런 중 밤하늘에 연한 초록색 빛이 구름사이로 달빛처럼 비쳐보였다

‘혹시 저것은 오로라?’

순간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그것이 진짜 오로라인지 확인할 길은 없었지만 나는 그것을 오로라라고 믿기로 했다. 비록 희미하고, 불분명하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 빛은 그대로 아름다웠다. 그 몬트리올의 빛은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숙소 뒷집 지붕 위 오래 전 버려진 기타. 아무리 몬트리올이라도 부모와 예술은 원수지간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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