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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Chu Jan 31. 2019

그것은 오로라였을까

몬트리올 편

“어쩌면 몰락이란 우월한 사람을 보고 그들을 닮으려 하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 오르한 파묵의 <하얀 성> 중   

     

약소민족에게 ‘정체성을 지키는 것’과 ‘선진국과의 경쟁’은 힘겨운 줄타기와 같다. 정체성을 고집하다보면 경쟁에서 도태되기 쉽고, 강자의 논리를 인정하면 순식간에 정체성을 잃고 ‘몰락’하게 되기 때문이다. 도태 혹은 몰락, 이것이 대다수 약소민족이 처한 운명이다. 그리고 나라가 작을수록 이 싸움은 더 힘겹고 절박하다.

    

그런데 그 약소민족이 스스로 우월하다고 자부하는 프랑스인이라면? 퀘벡 주는 그런 곳이다. 이민자들이 서로의 정체성을 애써 외면하며 뒤섞여 살아가는 북아메리카에서 퀘벡은 여전히 프랑스문화를 고수하는 한편 독립적인 자치행정체제를 채택하고 있다. 그들은 왜 프랑스인이라는 정체성에 이토록 집착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과 약소민족의 정체성전쟁은 어떻게 다른가? 몬트리올로 향하는 내내 무엇보다 그것이 궁금했다.       

 

몬트리올의 기원    


초기 유럽 이주민들은 대서양 건너편의 아메리카 동부 연안에 정착했다. 프랑스인은 북쪽에 모여 누벨프랑스, 영국인은 남쪽에 모여 뉴잉글랜드라 불렀다. 퀘벡 주는 프랑스인들이 처음 발을 디딘 곳으로, 그들은 세인트로렌스 강에 떠 있는 섬이었던 몬트리올을 정착의 중심거점으로 삼았다. 인디언의 습격을 피해 모피거래와 선교를 하기 좋은 지형이었기 때문이다.   

  

모피와 목재 등의 교역규모가 커지자 정복자들 사이에 이권충돌이 생겼고, 프랑스인과 영국인은 해당지역의 인디언들과 연합해 전쟁을 벌였다. 이름 하여 ‘프렌치-인디언 전쟁(1755-1763)’. 이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인들은 광활한 아메리카를 장악했고, 프랑스인들은 본토로 나아가지 못하고 최초 정착지에 머물며 자치주를 만들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약소민족이라기보다 고립된 정복자들이고, 자발적 고립을 통해 자신들이 원조 개척민임을 증명하려 해 왔다 할 수 있다. 알제리와 퀘벡을 통해 보건데, 프랑스인들은 한 번 소유한 것을 좀체 포기하지 못하는 성향이 있음이 분명하다.     


정작 이 싸움의 피해자와 수혜자는 따로 있다. 최대 피해자는 인디언 부족들이다. 그들은 영토를 보장해주겠다는 약속을 믿고 두 나라 군대와 함께 싸웠지만, 결국 모든 부족이 몰락해버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최대 수혜자는? 몬트리올 바로 아래 있는 토론토이다. 분리운동이 한창일 당시 몬트리올의 비프랑스계 주민과 회사가 토론토로 대거 이동, 몬트리올을 제치고 토론토가 캐나다 제1의 도시가 되었던 것이다. 

노트르담 성당 앞 다름광장. 몬트리올 건설에 공헌한 인물들을 모아 놓은 동상 

추운 나라의 프랑스인 

   

퀘벡은 사람이 살기에는 추운 곳이다. 퀘벡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몬트리올은 그나마 일 년에 3-4개월의 여름이 있다. 그들은 이 기간 중 기다렸다는 듯이 각종 페스티벌을 벌인다. 재즈 페스티벌(6월말-7월초)과 국제영화제(8월말-9월초), F1그랑프리(6월초)와 국제코미디 페스티벌 ‘Just for Laughs’(6월중순)... 6월부터 9월까지 축제의 연속이다.     

 

하지만 우리가 간 4월은 아직도 겨울. 예약해놓은 숙소(BNB)에 도착하자마자 주차장 진입로에 얼어붙은 눈 더미부터 일단 뜨겁게 치워야 했다. 따뜻한 캘리포니아를 놔두고 계획에는 1도 없었던 이 추운 곳까지 굴러들어오다니... 이곳에 처음 발을 디딘 프랑스인들의 심정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숙소 근처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주택가의 계단이었다. 길에서 바로 옥외계단을 통해 각층의 현관문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었는데, 전체적인 건물의 크기는 옆에 붙은 건물과 맞추되 벽면, 계단, 창문, 창살을 달리해 내 집을 구분하고 있었다. 현관문 위의 캐노피는 눈을 가리고 털기 위한 방편으로 보였다.   

  

추위를 막기 위한 단순한 구조 위에 작은 부분 하나하나까지 각자의 방식으로 장식한 거리는 이곳 사람들의 취향과 사고방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결코 만만한 사람들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 모든 장식에서 프랑스를 향한 그리움을 느낀 것은 지난 역사에 대한 나의 과도한 집착 때문이었을 것이다. 


숙소가 있던 주택가의 계단

노트르담 드 몬트리올 - 신에게 바치는 궁전


토론토에서 2박 3일의 일정으로 떠난 몬트리올. 넓은 캐나다 지도에서 볼 때는 두 곳이 한 동네나 다름없이 가까워보였으나 실제 거리는 800km. 가고 오는데 하루씩 걸리다보니 정작 도시를 둘러 볼 시간은 하루 밖에 없었다. 노트르담 성당과 몽 레알 언덕, 그리고 몬트리올 미술관을 예정하고 숙소를 나섰지만, 성당과 올드시티에서 너무 오래 머무는 바람에 언덕에서 바라보는 도시 전망을 포기하고 바로 미술관으로 향해야 했다.  

   

‘노트르담’은 우리말로 ‘성모마리아 성당’이다. 프랑스인들이 정착했던 거의 모든 곳에 노트르담 성당이 있는데, 성모마리아의 모성적 이미지가 이주민의 안식과 이교도의 선교에 더 적합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프랑스군대가 열병식을 하던 ‘다름 광장’을 빙빙 돌아 어렵사리 주차를 하고 성당으로 향했다.     


성모마리아처럼 따뜻하고 소박한 분위기의 성당이지 않을까 예상했지만 ‘노트르담 드 몬트리올’은 지금까지 본 성당 중 단연 화려한 장식을 자랑하고 있었다. 기둥과 들보는 물론 제단까지 금박으로 장식되어 있고, 빛을 받은 코발트블루와 딥그린 벽지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빈틈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성상과 성화가 빼곡하게 자리한 가운데, 멋진 문양을 대고 오려낸 것 같은 파이프오르간이 후면을 채우고 있었다.

    

성당이라기보다는 궁전, 기도보다는 음악회가 어울릴 만한 분위기였다. 동시대 프랑스 귀족들의 취향을 반영했을 그 화려함에서 이곳에 이주해 부를 쌓은 사업가들의 고향에 대한 향수와 구원에 대한 열망을 느꼈다. 이주민 최초의 성전이자 안식처를 정성스레 꾸미는 일은 그야말로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화려한 실내장식에서 신앙보다 욕망을 먼저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중앙 예배당 뒤편에 있는 작은 기도실(경당)에 들어서는 순간 나의 감흥은 급격히 한쪽으로 쏠렸다. 모든 벽과 제단이 온통 황금빛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사진촬영을 금지하는 것은 개인의 봉헌물이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그들로서도 이 호화로움이 마음한편 민망하기 때문인 것도 같았다. 이 황금의 기도실을 봉헌한 재력가는 그가 바랐던 대로 천국에서 편히 쉬고 있을까?

신성한 성당을 둘러보는 내내 여러 불경한 생각들이 머리를 맴돌았다.              

몬트리올 노트르담 성당 대 예배실 Basilique Motre-Dame

몬트리올 미술관 - 노스텔지어의 컬렉션   

  

미술관 근처에 있다는 ‘이탈리아거리’를 찾아 헤매다 시간을 허비하고, 늦은 점심을 먹고는 ‘몬트리올 미술관(Musee des Beaux-Arts de Montreal)'으로 향했다. 1877년 한 사업가가 기증한 작품과 작은 건물로 시작된 미술관이 이후 140년 동안 꾸준히 확장되어 현재 5개 동의 큰 건물로 늘어났다고 한다. 생각보다 큰 규모에 마음이 급해졌다.  


컬렉션은 기대 이상이었다. 르네상스와 근현대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그림들을 공백 없이 촘촘히 모아 놓았는데, 후기 르네상스 로코코 풍 그림과 19세기 말 프랑스 아카데미즘 화가들의 작품이 많다는 점에서 역시 프랑스적이었다.     


개인적으로 ’부게로‘나 ’타데마‘ 같은 후기 아카데미즘 화가의 작품을 직접 볼 수 있어 좋았다. 권위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인상파 화가들을 아마추어라 깔아뭉갠 그들. 개인의 영달을 위해 시대에 역행한 수구 꼰대들이 분명하지만, ’타데마‘의 물과 대리석, ’부게로‘의 인물화는 그것을 보고 있는 동안만은 그 볼품없는 인성을 잊게 만들 정도로 장인적이었다.  

부게로( Adolphe William Bouguereau)의 자화상과 인물화 

근현대 작품의 경우 우리가 알고 있는 주요 화가들의 작품을 적어도 하나 이상씩 전시하고 있었다. 인상파 작품이 꽤 많은 가운데, 주요 화가의 경우 소품이라도 악착같이 구해 미술사의 주요흐름을 연결해 놓았다. 당시 미술의 주무대가 프랑스였음을 감안해보면 이 역시도 프랑스 적이라 할만 했다.  

   

유달리 유명한 작품이 없어 오히려 좋은 점이 많았다. 관람객이 골고루 분산되어 혼잡하지 않았고,  ‘호들러 (Ferdinand Hodler)’와 같이 잘 몰랐던 화가의 작품들에 주목할 수 있었으며, 정신없이 유행이 변하던 근대회화의 흐름이 한 눈에 들어왔다.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이 미술관에도 각별히 아끼는 걸작들이 있었으나 1972년에 한꺼번에 도난당했다고.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곳은 에스키모 전통미술 전시실이었다. 사람이나 동물을 닮은 돌을 골라 둥글고 부드럽게 다듬은 형태가 정겨웠고, 특히 전설 속에나 나오는 기이한 형상의 반인반수 조각들이 신선하면서도 강렬했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현대미술 섹션에 전시되어 있는 거대한 나무 조각품들. 캐나다의 대자연을 그대로 머금은 육중한 양감이 온몸을 뿌듯하게 채웠다. 나도 늘그막에는 산 속에 들어가 평생 쌓인 스트레스를 나무를 쪼며 풀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했다. 

에스키모 조감품과 거대한 목조각


한번 들어 갔다하면 빠져나오기 어려운 곳이 미술관. 우리는 결국 관람종료 방송에 쫓겨 가며 전시실들을 들락거렸고, 문 닫는 기념품 가게에 들어가 그림엽서 몇 장을 가까스로 사서 나왔다. 차를 주차해 놓은 골목길을 찾아 언덕을 걸어 올라가다 뒤돌아 몬트리올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미술관과 도심 위로 초저녁 찬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미술관을 잘 꾸미고, 힘닿는 대로 좋은 그림을 사 모으는 일만큼 호사스러운 일이 있을까마는, 오늘, 지금, 이곳의 호사에는 그들의 영혼 깊숙히 뿌리박은 프랑스를 향한 진한 그리움이 베어 있다..

      

선명하게 남은 희미한 빛


그날 밤. 숙소 뒤편의 테라스에서 동네를 내려다보았다. 고요하기 짝이 없는 밤이었다. 

이렇게 조용하고 평온한데 왜 굳이 분리 독립을 고집할까? 이 추운 곳에서 지금보다 더 프랑스다워지는 것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조금 덜 선명하게 둥글둥글 어울려가며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것이 훨씬 보람 있는 일이 아닐까?    

  

그런 중 밤하늘에 연한 초록색 빛이 구름사이로 달빛처럼 비쳐보였다. 

‘혹시 저것은 오로라?’ 

순간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그 속에는 노트르담 성당의 벽면을 은은하게 비추던 바로 그 빛깔이 선명하게 살아있었다.

조국 프랑스에는 없고 이 멀고 추운 고립된 정복지에만 있는 은총의 빛이었다.

옮겨심은 나무에 또 다른 열매가 열리듯, 사람도 사는 곳에 따라 다른 꿈을 꾼다.

그렇게 정복자의 오만한 선민의식은 점점 희미해지며 이곳의 풍경을 완성하는 특별한 퍼즐이 되었겠지.      


얼핏 스쳐간 흐릿하고 불분명한, 그래서 더 간절하고 신비로운 빛이 몬트리올의 하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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