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의 색을 찾아 떠난 소년 『바람은 보이지 않아』
2023년 가을날, 스페인 일러스트레이터 ‘루이스 멘도’의 판타스틱 시티 라이프(Fantastic City Life) 전시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도시의 풍경, 삶, 사람, 가족, 주말, 직장 생활의 모습을 작가만의 시선으로 담백하고 낭만적으로 그려낸 전시였다.
매일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혼란의 도시에서, '우리는 충분히 자유롭게 즐기며 살아갈 수 있다'는 작가의 의도가 인상적이었다. 그림을 감상하면서 중간중간 삽입된 작가의 메시지를 마주하고, 다시 나를 들여다 보게 되었다.
#1. 나이가 든다는 것은?
“나이가 들수록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을 덜 쓰기 때문에 해방감을 느끼곤 한다”
이 문장 앞에 나는 오랬동안 머물렀다. 마흔 살로 접어들면서 내 나이의 앞자리가 4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20~30대의 예쁘고 푸르른 청춘은 다 지나간 것 같고,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게 중후한 중장년의 시기로 걸어가야 하는 게 낯설고 싫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나이가 들어 나는 성숙해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졌다. 작가의 메시지처럼, 남의 시선보다는 나를 잘 가꾸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있다. 또, 내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도 말이다. 세월이 지나고 경험이 쌓이면서 나의 취향, 라이프 스타일, 삶의 가치관이 분명해지니 선택도 쉬웠고, 후회도 적었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에너지를 나에게 더 많이 쓸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2. 나에게 집이란?
“집은 편안하고 행복한 공간이길 바란다. 창문을 통해 햇빛이 들어오고, 영화를 보고, 그림을 그리며, 책을 읽는 거지”
나에게 집은 어떤 의미일까? 아이들이 정신없이 학교, 어린이집으로 나가고, 아침 설거지를 마치고 청소기를 돌린다.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키면, 오늘의 새 공기가 시원하게 불어온다. 이불을 반듯하게 개키고, 거실의 물건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따스한 아침 햇살이 집 안으로 한가득 들어올 때, 평화로움도 함께 찾아온다. 우리 가족의 아담하고 안전한 안식처이다.
인스타나 오늘의 집 어플에 나오는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공간은 아니지만, 아이들이 스케치북에 그린 그림, 손 때 묻은 한글놀이 포스터, 가족이 함께 찍은 인생 네 컷 사진들, 색연필로 벽에 그린 낙서, 식탁 위 감기약, 바닥에 떨어진 레고 블록들. 우리 가족이 지금을 살아가고 사랑하는 공간, 우리 집이다.
#3. 평범함 속의 특별한 시간은?
“평범한 걸 특별하게,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사람들은 도시를 생각할 때 장소를 먼저 떠올리지만, 사실 도시의 핵심은 ‘시간’이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살면서, 도시인으로 보내는 나의 시간들. 소소하지만 나를 행복하게 하는 순간들. 내가 좋아하는 하루의 시간들을 떠올려보았다.
아침에 이불속에서 눈곱 낀 얼굴로 미소 짓는 둘째 아이와 장난칠 때
남편이 두 아이들을 챙겨서 출근할 때 (나는 자유다-)
지하철 타자마자 내 앞에 빈자리가 생겼을 때
카페에서 내가 예전에 좋아했던 음악이 나올 때
아파트 단지 사이에 조각난 파란 하늘 아래 벚꽃 나무길을 걸을 때
거실에서 완전히 집중해서 책을 읽는 첫째 아이를 볼 때
저녁 준비를 하다가 주방 창문 사이로 분홍색 석양이 질 때
금요일 밤 가족이 식탁에 모여 배달시킨 따끈한 치킨 상자를 열 때
도서관에서 보고 싶었던 책을 발견했을 때
아이들 모두 재우고 나왔는데 시계가 9시 30분을 가리킬 때 (아싸! 냉장고에 맥주 있나?)
우연히 책을 읽다가, 영화를 보다가, 노래 가사 속에서 문득 머릿속을 스치며 삶의 영감을 느끼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예술은 우리의 일상을 풍성하게 만들고, 새로운 생각이나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처음에 접하자마자 바로 사랑에 빠진 그림책 『바람은 보이지 않아』는 나에게 인생에 대한 철학을 다시 한번 떠올려보게 한 책이다.
그림책의 스토리는 눈이 보이지 않는 소년의 궁금증으로 시작한다. ‘바람은 과연 무슨 색일까?’ 소년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난다.
늙은 개는 소년의 질문에 “들판에 가득 핀 꽃의 향기로 물든 색, 그리고 빛바랜 나의 털색”이라고 답한다. 그러자 나무 뒤에서 엿듣던 늑대가 “아니야. 바람은 숲 속에 깔린 젖은 흙이 품고 있는 어둠의 색이야”라고 중얼거린다. 마치 시처럼 표현되는 바람에 대한 설명들, 정답이 없는 삶에 대한 비유, 마지막으로 소년이 만나는 바람에 대한 예상치 못한 결말이 큰 감동을 선사한다.
『바람은 보이지 않아』는 실제 시각 장애인도 읽을 수 있도록 책 제목을 점자 구멍으로 뚫고, 다양한 책의 질감을 손 끝으로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장면에서는 오돌토돌한 물방울의 엠보싱이 만져지고, 나무 기둥에 기대는 장면에서는 나무껍질과 거칠거칠하고 딱딱한 텍스쳐가 느껴진다. 눈이 보이지 않는 소년은 친구들의 다채로운 표현과 설명, 그리고 섬세한 촉각을 활용해 바람의 모습을 접했을 것이다.
그림책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전시회에서 한 작품, 한 작품을 감상하는 듯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우리가 평소에 당연하게 느끼던 바람의 모습을 이렇게 다양하게도 표현해낼 수 있구나. 익숙한 것들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잊고 지냈던 나와 삶의 또 다른 면을 발견하게 된다.
『바람은 보이지 않아』의 소년이 '바람은 과연 무슨 색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많은 친구들을 만난다. 소년의 질문에 대해 큰 산, 코끼리, 꿀벌, 사과나무들은 자신의 상황, 경험에 빗대어 바람을 설명한다.
각자의 주관적이고 의미 있는 답을 듣다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하며 공감이 된다. 하지만 소년에게는 친구들의 답이 그리 와닿지 않는 모양이다. 바람의 색을 알고 싶었던 소년은 조금씩 지쳐가고, 아주 큰 거인이 나타나 소년에게 바람의 색을 찾는 지혜를 알려준다.
“바람은 이 색이기도 하고 동시에 저 색이기도 하지. 바람은 모든 색이란다. 네가 이 책 속에서 만난 모든 색처럼”
소년은 작은 질문에서 시작했지만, 답을 구하는 여행을 통해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넓어지고, 익숙한 것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는 법을 깨닫게 된다. 이렇듯, 질문에는 힘과 방향이 있다.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통해 내면을 탐구하고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키울 수 있다. 단순히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다. 사고의 틀을 깨고 넓히는 것이 바로 질문이다.
“바람은 무슨 색일까?”라는 질문에 저마다의 정의를 내린 친구들처럼, “나에게 사랑은 어떤 색일까?”, “나에게 가족은 어떤 의미인가?”, “내가 좋아하는 나의 모습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자. 그러다 보면 잠시 잊고 지냈던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더 나은 삶의 가치를 찾아나가는 힌트를 얻게 될 것이다.